중국- 대만의 무르익는 밀월

지난 5월 16일 대만 수도 타이베이의 국제 관문인 타오위안공항. 주말인데도 썰렁한 모습이다. 대한항공의 이종혁 타이베이 지사장은 “매년 5% 증가해 온 대만의 출국자 수가 지난해 5.5% 줄어든 850만 명에 그친데 이어 올 1분기에도 13% 감소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5월 20일로 마잉주 총통 취임 1주년을 맞은 대만 경제에 불황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고 있다.= 타이베이 최대 전자상가인 광화마트. 대만 정부가 연초 소비 진작을 위해 전 국민에게 제공한 소비 쿠폰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무색하게 손님이 뜸한 모습이다. 전자 제품 소비만이 아니다. 이민호 KOTRA 타이베이 무역관장은 “2005년에 55만 대에 달하던 자동차 판매량이 지난해 25만 대로 절반이상 줄었고 올 들어서도 감소세가 뚜렷하다”고 말했다. 타이베이의 명동으로 불리는 시먼딩에서도 간간이 점포 임대 문구가 눈에 띈다. 지난 3월 실업률이 5.81%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데다 무급 휴가가 늘면서 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있는 탓이다. 실제 대만의 1분기 성장률은 사상 최악인 마이너스 10.24%를 기록했다. 마 총통 취임 1주년을 앞두고 야당인 민진당이 지난 5월 17일 주도한 반정부 시위에 10만여 명이 거리로 몰려 나온 것도 이 같은 경기침체와 무관하지 않다.하지만 전문가들은 대만 경제가 최악은 지났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김기윤 대우인터내셔널 타이베이 지사장은 “화학제품 가격이 3월부터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고 철강 제품도 이달 들어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황즈펑 대만 국제무역국장(차관)도 “1분기 수출이 전년 동기보다 30% 이상 감소했지만 작년 11월과 12월(40%)에 비하면 감소폭이 줄어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만의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에는 중국의 경기 부양과 맞물린 양안 관계 개선이 깔려 있다. 타이베이의 랜드마크인 101층 빌딩 앞에서는 중국 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만 관광산업의 활력소가 되고 있는 중국 관광객은 올해 60만 명에 이를 전망이다. SKC하스디스플레이의 류탁기 타이베이 지사장은 “중국이 농촌의 가전제품 구매를 보조하는 자뎬샤상(家電下鄕) 정책 덕에 대만의 액정표시장치(LCD) 공장 가동률이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만의 2위 LCD 업체인 치메이(CMO)는 벼랑 끝에 몰렸다가 중국 정부 주선으로 중국 업체가 LCD를 대량 구매하면서 기사회생하기도 했다. 대만 언론들은 연일 양안 관계 개선 조치들을 보도하고 있다. 지난 5월 13일 대만 일간지 중국시보엔 제조 서비스 공공사업 등 3개 부문 99개 업종에 중국 자본의 투자를 허용한다는 개방 리스트 보도가 1면을 장식했다. 나흘 뒤인 17일 중국 정부는 대만에 대한 8대 우대 조치 발표로 이에 화답했다. 전자통신 바이오의약 해운 공공건설 유통 기계 방직 자동차 등의 대만 투자 사절단을 조직하고 공산품 구매단을 5월부터 7월까지 3차례 대만에 보낸다는 내용 등이 골자다. 농산품 구매 사절단도 상·하반기 각각 대만에 보내기로 했다. 중국 구매단의 잇단 대만 방문으로 3분기엔 수출이 플러스 성장을 할 수도 있을 것(황즈펑 국장)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마 총통의 지지율이 반등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양안 해빙이 대만 경제의 신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취임 때 58%를 기록했던 지지율은 금융 위기가 강타한 지난해 하반기 30%대로 추락했지만 최근 56%대로 다시 올라서고 있다. 대만 증시의 가권지수도 올 들어 40% 이상 급등하며 마 총통 취임 1주년에 축포를 터뜨렸다. 대만 재계는 경기가 조기 회복될 경우 해외에 나가 있는 6000억 달러 이상의 대만 자본의 회귀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금융 위기 속에서 대만의 한국 견제 행보가 심상치 않다. 현지에서 만난 한국 기업인들은 한국 환율에 연동해 대만 달러 환율을 통제하고 있다는 분석까지 내놓을 정도다. 관리형 변동환율제가 적용되는 대만달러는 한국 원화가치가 추락한 지난해 동반 급락세를 보이면서 달러당 36대만 달러까지 밀렸다가 최근엔 32달러 선까지 다시 올라온 상태다.대만의 한국 기술 인수도 적극적이다. 한국의 반도체 부품 업체가 매물로 나오자 1주일 만에 3개 대만 업체가 협상을 요구했다는 현지 한국 기업인의 전언이나 하이디스 인수에 경쟁사보다 30% 이상 입찰가를 높이 써냈다는 얘기도 대만의 공격적인 행보를 엿보게 한다. 한 한국 기업인은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 TSMC의 임원이 “반도체 관련 기술을 가진 기업이나 개인 대학 연구소를 소개해 달라. 모두 사겠다”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대만 정부 보고서는 한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과 FTA에 준하는 경제협력틀협정(ECFA)을 추진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을 정도다(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 최용준 대표보).대만의 한국 견제는 이미 결실을 내고 있다. “대만이 18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과 무역에서 흑자를 냈다. 한국에 밀리면 끝이라는 위기의식이 만든 결과다.” KOTRA의 이민호 타이베이 무역관장은 “대만은 한국을 경쟁자로 보는데 한국은 대만에 무심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91년 이후 매년 한국에 대해 무역수지 적자를 내온 대만이 올 들어 1분기 처음으로 흑자를 낸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무역흑자 규모는 2억7000만 달러로 크지 않았다. 이에 대해 대만 경제부의 한 관리는 “대만 경기가 위축돼 한국으로부터의 D램 수입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대만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을 꾸준히 늘리면서 무역적자를 계속 줄여 온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게 이 관장의 진단이다. 특히 마 총통의 양안 해빙 정책은 대만 경제에 날개를 달아줄 태세다. ●대만에 전자통신 바이오의약 해운 공공건설 유통 기계 방직 자동차 등 8대산 업 투자시찰단 파견●대만에 상·하반기 농산품 구매단 파견. 공산품 구매단 5, 6, 7월 파견●대만 기업의 중국 인프라 사업 참여 지원●중국인 대만 여행 확대(올해 60만 명)●양안 경제협력 시스템 구축●대만인 중국 자격증 획득 허용(회계사 등 11종)●대만 농민들의 중국 내 농장 건설 확대●대만 로펌 푸저우와 샤먼에서 대만인 상대 영업 허용지난 5월 14일과 15일 대만 정계는 물론 재계의 리더들은 한 명의 한국 기업인을 극진히 환대했다. 건설 업체 토보콤과 전자 부품 업체 화인엘텍을 비롯해 거제 백병원과 경기도의 화도중학교 등을 운영하는 백용기(49) 거붕그룹 회장이 주인공. 서울타이베이클럽이 생긴 2002년부터 수석 부회장을 맡아온 백 회장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대만 경제전문훈장을 받았다. 주로 외국인들에게 수여되는 대만의 경제훈장은 원래 3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마 총통 취임 후 전문훈장으로 통합되면서 경제부 최고 등급 훈장으로 격상됐다. 이전의 경제훈장을 받은 한국인은 있지만 경제전문훈장은 백 회장이 처음이다. 백 회장은 “1992년 한국과의 단교로 슬픔을 맛본 옛 친구(대만)와 민간 교류가 지속되도록 다리를 놓아 준 것밖에 없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그런 그에게 대만 정부는 대만 국기가 딸린 귀빈용 승용차를 내준 것은 물론 총통(대통령)에서부터 국회의장 격인 입법원장과 경제부장관 외교부 차관 등이 백 회장이 인솔한 민간교류단을 일일이 환대하는 일정을 마련했다. 백 회장은 ‘대만의 이건희 회장’으로 통할 만큼 영향력이 강한 원로 기업인 쿠롄쑹 중국신탁그룹 회장을 양아버지로 부르고 최대 건설 업체인 위안슝 그룹의 차오텅슝 회장과도 막역한 사이다.오토캐드를 가르치는 학원을 세워 기업인의 길을 걷게 된 그는 한민족문화협회 총재와 뽀빠이 유랑극단 명예단장을 맡는 등 문화 예술계에 폭넓은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대만과의 문화 교류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그는 대만의 정·재계 리더들을 만날 때마다 우정과 상호 신뢰, 그리고 잦은 왕래로 이뤄진 한국과 대만판 3통을 이루자고 제안했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