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 비포장길, 하루에 두 번 읍내행 버스가 다녔다.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었던 아버지는 사촌형 등에 업혀 버스를 탔다. 그리곤 보름 뒤, 아버지는 커다란 책 보따리 10여 개와 함께 마을로 돌아오셨다. 부산 고모 집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다. 어떻게 그 몸으로 부산까지, 그것도 책 보따리까지 껴안고 오셨는지 아무도 몰랐다.고모 집에 가기 위해 아버지는 우선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아마 화장실에도 다녀와야 했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하루에 한두 번 있는 여수행 버스를 탔을 것 같다. 여수 공용정류장에서 다시 여객선 터미널로 간 후에는 아마 밤새워 배를 타고 부산항에 내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고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가 고모 집 근처 정류장에 내렸을 것이다.부산 고모 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나보다 서너 살 많은 형제들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나에게 줄 책과 학용품을 가지러 부산까지 다녀오시곤 했다. ‘나는 한 걸음도 못 걷는 병신인데, 나 좀 업어서 옮겨 달라’고 소리 질러 가며 장소를 옮겨 다니며 다녀왔다는 얘기도 들었다.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악성관절염을 앓았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월반을 거듭했던, 집안의 기대를 듬뿍 안고 자라났던 막내의 발병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고통이었다.

그 시절 서울대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의사의 예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서울대병원 의사는 “결국은 관절의 마디마디가 굳게 돼 한 걸음도 걷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언은 현실이 됐다. 그 예언을 우회할 수 있는 길은 몸의 모양을 형성하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몸을 의자에 묶었다. 휠체어가 없던 시절 의자 모양으로 몸을 굳게 만들어야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것이다. 의자의 틀로 몸을 주조한 것이다. 2년간의 고통스러운 절대 구속을 거쳐 아버지의 몸은 의자 모양으로 경직됨과 동시에 새롭게 창조됐다. 평생을 의자 모양으로, 의자에 앉은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운명이 된 것이다.

다행이라면 온 몸은 굳었지만, 정신은 더욱 강건해졌고 팔을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은 남았다. 그래서 팔 동작만으로 59년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었다.나는 아버지의 형님 되시는 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경주 최씨 일가의 관습대로 작은아버지였던 아버지의 양자로 예정됐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사시던 아버지는 우리 집으로 옮겨오셨다. 아버지에게 있어 결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맨 처음 나는 막내삼촌이라는 말이 어색해 ‘아저씨’라고 불렀다. 어느 때부턴가는 ‘작은아버지’라고 불렀다.내 공부는 온전히 작은아버지의 몫이었다. 철없이 굴다가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은 적도 여러 차례다.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해야 될 사람이 버릇없이 군다”며 혼나는 일은 다반사였다. 머리도 아버지가 직접 깎아 주셨고 간간이 사진을 찍어 주시며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면 몇 살 때 최재천 사진, 이렇게 설명이 달릴 것”이라며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등학교 2학년 시절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광주는 완벽하게 고립됐다. 해남에서 광주로 보행 길이 간신히 뚫렸던 5월 28일까지 10여 일 동안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울음으로 함께하셨다.돌아가시기 보름 전 생부모의 동의 아래 나는 아버지의 호적에 정식으로 입적됐다. 그때 아버지라고 마음껏 불렀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의자형 몸에서 비로소 직립형 몸으로 되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속으로만 ‘아버지, 아버지’라고 외쳤을 뿐, 차마 입 밖으론 부르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그리곤 이제야 늦은 밤 집에 들어갈 때면 하늘의 별을 향해 아버지의 안부를 묻곤 한다. 그렇게도 그리운, 정말이지 피가 맺히도록 그리운 ‘아버지!’

최재천·전 국회의원1963년생.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제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서울 성동갑).
전남대 법대 졸업(1986년).
사법연수원 제19기 수료(1990년).
이화여대, 광운대, 영남대 법대 겸임교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