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두고 예산안 딜레마

영국 경제의 수렁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라는 표현은 최근 영국 경제 상황을 이야기할 때마다 접두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형편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와 알레스테어 달링 재무장관, 머빈 킹 영국 중앙은행(Bank of England) 총재도 틈만 나면 경기 침체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다.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발한 후 영국 정부는 극단적 재정 확대 정책으로 대응해 왔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계에 이른 느낌이다. 결국 노동당 정부 스스로 약속했던 세제 관련 공약을 뒤집으면서까지 세금 인상 방침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올 한 해 영국 경제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예산안 내용을 살펴보면 영국 정부가 처한 딜레마를 짐작해 볼 수 있다.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런던 다우닝가 11번지(총리 공관인 10번지 바로 옆집) 영국 재무장관 관저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십 명의 사진기자들이 진을 치고 재무장관을 기다린다. 그해 회계연도의 예산안 의회 연설을 앞두고 관저를 나서는 재무장관을 취재하기 위해서다.올해도 관저 앞 풍경은 마찬가지였다. 알레스테어 달링 재무장관은 영국 의회의 전통대로 예산안 자료가 들어 있는 붉은 서류가방을 사진기자들 앞에서 높이 들어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예산 연설이 예정된 긴 하루를 시작했다.지난 4월 22일 영국 재무부가 발표한 2009년 예산안 내역은 당초 시장과 언론의 전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정부 차입 규모를 1750억 파운드라는 천문학적 수준으로 늘려 잡았고 정부 지출 규모를 150억 파운드 줄이겠다는 게 이번 예산안의 핵심이다. 우선 재정 적자 폭의 확대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는 했지만 영국 경제의 중·장기 진로와 관련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올해 정부 차입 예정액인 1750억 파운드는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12%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번 발표로 영국의 국가 채무 규모는 GDP의 80%에 육박하리라는 전망치도 제시되고 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적자재정을 감수하면서 균형 재정 목표 연도를 2015년에서 다시 2018년으로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영국 정부는 이번 예산안에서 오는 2011년부터는 정부 지출 확대 규모를 매년 0.7% 내에서 묶겠다고 공언했다. 이 수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에 기반해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의 지출 증가율보다 낮은 수준이다. 공공 분야 투자 확대를 통해 정부 서비스 개선을 공약했던 노동당 정부로서는 전통적 지지층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알면서도 불가피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 지출 삭감과 적자 재정 편성은 이번 2009년 예산안에 포함된 고소득자 세금 인상안에 비하면 별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 형편이다. 공공 부문 효율화를 통한 예산 절감과 팽창 재정을 통한 경기 부양 시도는 그 규모의 문제였을 뿐 이미 예산안 발표 이전부터 충분히 예상돼 왔던 조치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고소득자 세금 인상 방안은 내년 상반기 중 총선을 앞두고 있는 노동당 정부 입장에서는 꺼내기 싫은, 어찌 보면 최후의 카드였다.이번에 발표된 정부 증세안의 핵심은 내년 4월부터 연 15만 파운드 이상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 최고세율을 45%에서 50%로 인상하겠다는 방안이다. 특히 노동당 정부는 지난 2005년 선거공약을 통해 집권 기간 동안 소득세를 올리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어 이번 증세안 발표는 더욱 정치적 논란거리로 부상하고 있다.일부에서는 이번 증세안을 놓고 지난 1990년대 중반 노동당이 채택해 지금까지 지속돼 오고 있는, 이른바 ‘신노동당 (New Labour)’ 노선이 막을 내린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내놓고 있다. 당시 신노동당 노선은 전통 좌파들의 지지 기반 위에 서 있던 노동당의 외연 확대를 위해 부유층 증세에 반대한다는 노선을 천명했기 때문이다.노동당 정부는 이런 논란이 계속되자 고든 브라운 총리와 신노동당 노선의 설계자 중 한 명인 피터 만델슨 산업장관 등이 모두 나서 세금 인상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등 적극 대응에 나서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예산안에 대한 야당과 언론의 반응은 여전히 냉소적이다. 예산안이 의회에 제출된 다음날 아침 영국의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정부안의 비현실성을 꼬집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심지어 데일리 메일은 영국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빗대 ‘이상한 나라의 알레스테어(재무장관)’라는 제목을 1면 머리에 올렸다. 또 보수 성향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고소득자에 대한 증세안을 겨냥해 ‘계급 전쟁 막 오르다’라는 자극적 제목으로 부유층의 정서를 대변하기도 했다.내년 상반기 총선을 앞두고 있는 야당인 보수당의 비판은 더욱 공격적이다. 보수당은 이미 예산안 발표 일자가 확정되자 이날을 ‘심판의 날’로 규정하며 노동당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에 대해 총공세를 펴 왔다. 노동당 경제팀을 향해 경제 인식이 안이하다는 비판을 넘어 ‘정직하지 못하다’고 공격해 왔는가 하면 예산안 내용이 발표되자 아예 ‘판타지 소설’이라고 폄훼해 버리기도 했다.영국 정부의 경제 인식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 정부가 제시한 경제 전망치로부터 나왔다. 지난해 11월 예비 예산안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재무부는 올해 경기가 마이너스 1% 안팎에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번에 예산안을 확정하면서 올해 경기 전망은 마이너스 3.5% 성장으로 곤두박질쳤다. 불과 6개월 만에 3배 이상 전망치를 수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지나치게 낙관적 전망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안팎에서 받고 있다.문제는 야당인 보수당 역시 이번 예산안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증세안 등에 대해 뾰족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권 노동당 예산안에 대해 연일 공격의 칼날을 세워 온 조지 오스본 보수당 예비 내각 재무장관도 ‘내년에 보수당이 집권할 경우 증세안을 철회하겠느냐’는 질문에 ‘약속하기는 어렵다’고 한발 물러섰다.세금 문제가 갖는 이런 정치적 미묘함 때문에 보수 성향의 언론은 노동당 정권이 발표한 증세안을 놓고 보수당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한 정치적 복선이 깔린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 실질적 효과 면에서는 정부의 예측치를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간 싱크탱크인 재정연구원의 제임스 브라운 선임연구원은 “부유층 증세로 인해 줄어들 민간 소비와 이에 따른 세수 감소분을 감안하면 증세 효과보다 전체적으로 세수 감소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층 증세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예산안이 발표된 날 저녁 ‘더 타임스’가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포퓰러스와 함께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7%가 부유층 증세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반대 의견은 22%에 머물렀다.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 노동당과 보수당 처지에서는 재정 정책의 중·장기적 효과보다 당장 여론의 지지율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노동당의 증세 카드는 이러한 정치적 방정식에 착안한 것일 수도 있다. 10년이 훨씬 넘도록 장수한 노동당 정권 교체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차기 총선 변수는 그렇지 않아도 벼랑 끝에 몰린 영국 경제 위기 탈출의 해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성기영·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