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지는 디플레 그림자

도쿄의 고급 주택가 중 한 곳인 세타가야구 후타고타마가와에 신축된 고급 아파트 ‘베리스타 후타고타마가와’. 이 아파트를 건설한 도큐건설은 최근 분양가를 30%나 내렸다. ㎡당 72만 엔(약 1000만 원)이던 분양가를 50만 엔으로 낮춘 것이다. 분양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넘도록 72채 중 절반도 팔리지 않자 ‘눈물의 세일’을 한 것이다. 부동산 중개 회사인 예스스테이션의 쿠리하라 신고 부장은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고급 아파트를 짓기만 하면 분양은 걱정도 없었다”며 “그러나 경기가 급랭하자 주택 거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며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었다”고 말했다.일본의 부동산 시장 침체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작년 가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가 여전히 냉랭하다. 부동산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물가도 최근 하락세로 반전돼 일본 경제 전반에 디플레이션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거품 경제 붕괴 후 1990년대 디플레의 늪에 빠져 10년간 장기 불황을 겪었던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그러나 일각에선 올 상반기 경기 바닥론도 제기되는 등 경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최근 디플레이션 우려가 본격 제기된 것은 일본의 소비자물가가 1년 반 만에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3월 중 신선 식품을 제외한 전국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0.1%포인트 떨어졌다. 소비자물가가 하락한 것은 2007년 9월 이후 1년 6개월 만이다. 신선 식품과 함께 석유를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는 근원인플레지수는 3월 중 0.3% 하락했다. 근원인플레는 대부분의 국가가 기준으로 삼는 핵심 물가지수다.불황 속에 물가가 하락함에 따라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의 디플레 우려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지적한다. 노린추킨연구소의 미나미 다케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물가하락 추세가 앞으로 몇 개월간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며 “일본이 다시 디플레에 빠져들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부동산 가격 하락도 디플레 우려를 부채질하고 있다. 일본의 국토교통성이 최근 발표한 올 1월 1일 기준 공시지가는 전국 평균으로 전년 대비 3.5%포인트 떨어졌다. 전국 평균 공시지가가 하락하기는 3년 만이다. 일본의 전국 평균 공시지가는 거품경제 붕괴 후 1992년부터 하락을 지속하다가 16년 만인 2007년 상승세로 반전됐었다. 2008년엔 상승 폭이 1.7%에 달했다.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 따르면 올 상반기(1~6월) 도쿄의 오피스빌딩 임대료도 4년 만에 하락세로 돌아섰다. 하락 폭은 1998년 이후 13년 만에 최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부동산 시장을 지탱해 왔던 부동산 펀드 등 해외 투자 자금이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이탈한 후 돌아올 조짐이 없기 때문이다.일본의 부동산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분양 아파트는 10만 채를 밑돌아 거품 경제 붕괴 직후인 1992년 이후 16년 만에 가장 적었다. 도쿄 등 수도권의 아파트 분양은 13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올 들어선 감소 폭도 50%를 넘어 1996년 10월 이후 최악이다.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상당 기간 약세가 이어질 전망이다. 이노우에 아키요시 미쓰토모시스템주택융자 사장은 “글로벌 금융 위기로 투자 자금이 돌지 않으면서 부동산 수요도 실종됐다”며 “지난 수년간 주택과 오피스 빌딩의 공급이 크게 늘었던 점을 감안하면 부동산 가격은 상당 기간 오를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선 극심한 경기 침체를 반영해 실업률도 4년 7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총무성이 최근 발표한 3월 중 완전실업률(계절 조정치)은 4.8%로 전달에 비해 0.4%포인트 증가했다. 2개월 연속 상승을 기록한 것으로 2004년 8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특히 실업률이 1개월 사이 0.4%포인트 올라간 것은 1967년 0.5%포인트 상승한 이후 42년 만의 최대치다.총무성은 “고용 사정이 급속히 악화되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업자 수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67만 명 증가한 335만 명으로, 2005년 10월 이후 3년 5개월 만에 300만 명을 넘어섰다. 일본 정부는 고용조정기금 조성 확대 등을 통해 실업을 억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도산이나 인원 감축이 이어지면서 “실업률이 5%선을 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예측이 많다.후생노동성에 따르면 3월에는 해고 등에 따른 정규직 사원의 이직도 2만 명을 넘어서 심각한 고용 불안 현상을 보여줬다. 또 구직자 1명에 대한 구인자 수를 나타내는 유효구인배수는 3월 중 0.52배로 전달에 비해 0.07포인트 하락했다. 10개월 연속 떨어진 것으로 그만큼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요사노 가오루 경제재정상은 “내수가 워낙 미약해 세계 동시 불황으로 인한 수출 감소를 상쇄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호소했다.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의 0%에서 마이너스 3.3%로 크게 하향 조정했다. 연간 경제성장률로는 1998년의 마이너스 1.5%를 밑도는 사상 최저 수준이다. 세계경제 위기로 인해 수출이 급감하고 내수가 위축된 최근 경기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일본 정부는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경제성장률 추정치도 종전 마이너스 0.8%에서 마이너스 3.1%로 크게 낮췄었다. 이 때문에 전망대로라면 일본은 2년 연속 3%대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올해 경제성장의 경우 부문별로는 수출 감소가 가장 큰 마이너스 요인으로 분석됐다. 일본 정부는 금년 수출이 지난해보다 27.6%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미국 유럽 등의 경기 침체가 심각해 일본의 수출 회복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물경제 쪽에서 디플레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일본의 주식시장은 최근 호조를 보이고 있다. 주가는 지난달부터 회복 기미가 완연하다. 국내외 경기의 저점 통과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되면서 최근 닛케이평균주가는 3개월 만에 9000엔 선까지 회복됐다. 닛케이평균주가는 지난 2월 7500선 밑으로까지 떨어졌었다. 올해 저점 대비 20% 이상 주가가 올랐다는 얘기다.주가가 오르자 그동안 주식시장을 떠났던 ‘개미(개인 투자자)’들도 돌아오는 모습이다. 도쿄증권거래소가 발표한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증권거래소의 4월 중 거래 동향에 따르면 개인 투자자들이 지난달 둘째 주부터 3주 연속 순매수를 보였다.이 때문에 일각에선 경기 바닥론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다. 일본 경제가 올 1분기(1~3월)에 바닥을 치고 2분기부터는 서서히 회복세를 탈 것이란 전망이다. 실제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민간의 주요 이코노미스트 20명을 대상으로 분기별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조사한 결과 올 2분기에는 성장률이 플러스로 반전돼 1.4%를 기록할 것으로 나타났다. 예측대로라면 작년 1분기 이후 5분기 만에 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서는 것이다.한 이코노미스트는 “분기별 성장률은 2분기에 일단 플러스로 반전되지만 글로벌 금융 위기가 재현될 경우 일본 경제가 다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 2차 바닥을 경험할 가능성도 있다”며 “아직은 경기 전망을 낙관할 단계는 아니다”고 말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