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사리 통로를 통해 본 메디치 가문의 몰락사

영원한 가문도, 영원한 기업도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제국도 멸망했고, 해가 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던 영국도 시대의 부침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른바 ‘지속 가능 경영’의 소중함이 새삼스러운 요즈음, 350년을 넘기지 못하고 몰락한 메디치 가문의 슬픈 기억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메디치 가문은 왜 몰락했을까.메디치 가문이 몰락의 조짐을 보인 것은 피렌체의 대공(Grand Duke)으로 정식 등극했던 코시모 1세(1519~74) 때의 일이다. 그는 15세기의 동명이인이었던 가문의 조상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와 전혀 다른 타입의 리더였다.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제나 신중하고 겸손하게 행동했던 15세기의 코시모와 달리 16세의 대공 코시모는 황제처럼 거들먹거렸고, 독재자의 철권으로 피렌체를 통치했다. 그는 갑부인 나폴리 총독 돈 페드로 데 톨레도의 딸 엘레오노라와 정략결혼했다. 스페인으로부터 엄청난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온 엘레오노라를 위해 코시모 1세는 거대한 왕궁을 건설한다(1553년).지금 우피치 박물관과 함께 피렌체를 대표하는 박물관이 된 피티 궁전이 바로 코시모 1세가 아내를 위해 건축한 메디치 가문의 왕궁이었다. 코시모 1세 부부는 새로 건축한 피티 궁전에 입주하고, 장남 프란체스코에게는 자신이 거처로 사용하던 팔라초 베키오를 물려줬다. 프란체스코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드 1세의 딸이었으며, 스페인의 황제 카를 5세의 조카이기도 했던 요안나와 결혼했다(1565년),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사돈이 된 코시모 1세는 피렌체의 시민들과 점점 격리되어 갔다. 그는 피렌체에서 황제처럼 행동했고 과중한 세금으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다. 코시모 1세는 건축가 조르조 바사리에게 명령을 내렸다(1565년). 아들 부부가 사는 팔라초 베키오에서부터 자신의 피티 궁전까지를 연결하는 전용 비밀 통로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피렌체 도심의 팔라초 베키오에서 시작되는 이 비밀 주랑(柱廊)은 정부 청사였던 우피치(나중에 박물관으로 전환)를 거쳐,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 위를 지나 강 건너 편 언덕의 피티 궁전에 이르게 된다.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바사리 통로(Vasari Corridor)’로 부르는 이 비밀 주랑은 피렌체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메디치 가문의 도피 통로로 설계된 것이다. 그래서 안에서 밖은 볼 수 있었지만 반대로 밖에서 안은 볼 수 없도록 비밀스럽게 설계됐다. 이때부터 메디치 사람들은 바사리 통로에 설치된 비밀스러운 창문을 통해 피렌체 사람들을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바사리 통로의 사용은 메디치 가문의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피렌체 시민들의 삶과 유리된 채, 그들로부터 무리하게 거둬들인 세금으로 향락만을 즐기는 탐욕스러운 가문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피렌체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15세기의 코시모나 그의 손자였던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가 추구하던 피렌체 일등 시민으로서의 리더십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된다.역사가들은 메디치 가문이 문을 닫게 된 직접적인 책임을 코시모 3세(1642~1723)에게 돌린다. 이 무능했던 피렌체의 군주는 무절제한 주색잡기로만 유명했다. 결국 그는 불규칙한 폭식과 방탕한 생활 때문에 큰 병을 얻게 되고, 주치의 프란체스코 레디는 그에게 규칙적으로 걷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병약해진 코시모 3세가 자신의 건강 회복을 위한 걷기 운동의 장소로 찾아낸 곳이 바로 800m에 달하는 바사리 통로였다. 즉, 바사리 통로를 자신의 개인 피트니스 센터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 긴 회랑에서 걸을 때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조각품들을 그곳에 일렬로 전시하도록 했다.로마의 메디치 저택에 소장돼 있던 고대 조각품들도 이때 모두 피렌체로 옮겨졌다. 600점이 넘는 초상화들도 바사리 통로의 긴 벽을 일렬로 장식했다. 마사초,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도나텔로, 보티첼리,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을 후원하면서 르네상스 예술이 피렌체 시민의 자부심이 되도록 배려했던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전통은 이제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리더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상실한 채 개인적 욕심의 추구에 함몰됐을 때 가문이나 기업은 쇠락하게 된다. 메디치 가문의 몰락을 재촉했던 것 또한 리더의 소탐대실(小貪大失) 때문이었다. 피렌체 시민과 메디치 가문을 철저하게 격리했던 코시모 1세의 바사리 통로와 개인의 산책로로 쓰기 위해 모든 가문의 예술품들을 바사리 통로에 일렬로 전시했던 코시모 3세가 바로 그 장본인들이다. 지금도 피렌체의 아르노 강가에서 서면 훤히 보이는 베키오 다리 위에 일렬로 설치돼 있는 바사리 통로의 창문들이 한 위대했던 가문이 어떻게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됐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1743년,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사람이었던 안나 마리아 데 메디치(1667~1743)가 임종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은 완전히 문을 닫았다. 모직 산업에서 출발해 유럽 최대의 은행가로,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종교 명문가로, 그리고 프랑스에 두 명의 왕비를 시집보내고 영국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의 왕가와 사돈을 맺었던 위대한 메디치 가문은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지금도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가문의 혈통은 끊어졌지만 메디치 가문의 영광은 지금도 살아있다. 21세기의 피렌체 사람들은 18세기 중엽에 문을 닫은 메디치 가문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시민들에게 남긴 막대한 문화유산 때문이다. 세계 5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우피치 박물관이나 거대한 피티 궁전 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는 위대한 예술 작품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과 예술 애호가들에 의해 피렌체 시의 재정이 유지되고 있다. 1743년, 임종을 앞둔 안나 마리아는 자기 조상들이 모아왔던 모든 예술품들을 ‘이 작품들은 피렌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토스카나 정부에 전부 기증했다.안나 마리아 데 메디치는 생애 말년에 험한 꼴을 보게 된다. 외국인들이 피렌체 정부를 접수하고 메디치 가문에 모욕을 가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무능하고 탐욕스러웠던 코시모 3세가 죽자(1723년), 메디치 가문은 권력도 잃었고 가문의 명예도 잃었다. 안나 마리아에게 남은 유일한 기쁨은 바사리 통로를 거닐며 그곳에 전시된 조상들의 예술 소장품을 감상하는 일이었다. 그곳에는 15세기의 현자 코시모가 도나텔로에게 의뢰해 만든 조각이 전시돼 있었고, 20대 초반의 미켈란젤로가 그린 ‘도니 톤도’도 있었다.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사람 안나 마리아는 그 걸작 소장품들 앞에서 위대했던 조상들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중산층 모직업자로 출발했던 조반니 데 메디치(1360~1428)에서부터 이탈리아의 국부로 불렸던 코시모(1389~1464), 이름 그대로 ‘위대한’ 인물이었던 로렌초(1449~92), 격동의 16세기 가톨릭 역사를 책임졌던 두 명의 메디치 교황들, 토스카나의 대공으로 즉위했던 코시모 1세(1519~74), 프랑스의 여왕으로 온 유럽을 호령했던 카트린 데 메디치(1519~89)의 아름답고 놀라운 추억이 깃든 작품들이었다.바사리 통로를 걷던 안나 마리아는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사람으로서 가문의 전통을 영원히 지키기 위해 마지막 결단을 한다. 메디치 가문이 그토록 사랑했던 피렌체 시민들을 위한 마지막 선물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엄청난 예술품들을 모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혈통은 끊어졌지만 그 놀라운 가문의 위대한 전통은 르네상스 예술 작품들과 함께 지금도 피렌체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메디치처럼 경영하라’ 코너가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최선미·연세대 경영대학 교수김상근·연세대 신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