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감독 석현수·무용가 김미래 가족
인연은 인연을 낳고 그 인연은 또 다른 필연을 잇는 가교가 된다. 중앙대 아트센터 공연 예술 감독 석현수 씨와 무용가 김미래 씨의 경우가 그렇다.석현수 일본 NHK PD, ‘다큐서울’, ‘그곳에 가고싶다’ 등 다큐멘터리 연출, 아테네 문화사절단 총감독, 대전 엑스포 일본관 총감독, 강진청자축제 자문위원, ‘일본어 작업의 정석’, ‘동경라면산보’ 등 저술, 현재 중앙대 아트센터 공연 예술 감독.김미래 제3회 동아콩쿠르 금상 수상, 제30회 전주대사습 장원,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모제례 일무 이수자, 백제예술대 중앙대 강사, 예림무용단 단장, 최승희 춤연구회 부회장, 현재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학과장.그럴듯한 간판 하나 없던 신예 무대연출가와 촉망받던 무용가로 처음 만나 우여곡절 끝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이들이 주목받는 국악 신예 석무현 군과 한국 무용계의 신동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석예빈 양을 아들과 딸로 두게 된 데는 우연과 필연의 경계를 가늠하기 힘든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있다.사단법인 최승희연구소를 운영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는 김미래 씨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무용과 학과장이기도 하다. 전주대사습 장원을 비롯해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국내 최고의 대회인 동아콩쿠르 금상을 거머쥐며 가장 촉망받던 무용가로 이름을 떨치던 그녀가 석현수 씨를 만난 것은 공연을 준비하면서였다. 국악을 전공했지만 연출가로서의 자질이 더 돋보인다는 지도교수의 충고로 막 연출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석현수 씨는 마침 공연을 준비하던 김미래 씨를 만나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사실 그가 반한 것은 김미래 씨의 해맑고 순수한 성품이나 빼어난 외모보다 타고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이었다. 국악을 전공했지만 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의심하고 있던 그에게 김미래 씨의 춤사위는 심장이 멎을 만큼 아름답고 강렬한 것이었다.결혼하고 싶었지만 무언가 번듯한 직업이라도 갖지 않으면 딸을 내어줄 수 없다는 장인어른의 완고한 고집에 무작정 일본으로 날아갔다. 스스로도 일본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어디에서 그런 오기가 생겨났는지 모르겠단다. 죽자 사자 매달려 방송 연출을 공부하게 된 그는 결국 일본 NHK 방송에서 연출가로 활약할 만큼 성장했고 귀국 후에도 ‘다큐서울’ ‘그곳에 가고싶다’ 등 굵직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하게 됐다.하지만 방송연출가로서의 일은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고와 진행을 요구하는 방송 일이 늘 예술을 갈구하는 그의 감성을 채워주기엔 뭔가 부족했던 것이다. ‘다시 무대로 돌아가고 싶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그의 바람과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공연 예술 감독으로 전환한 그는 자신의 예술가적 기질과 그간 다져 온 방송연출가로서의 기획력, 스케일이 맞물리면서 놀랄만한 성과들을 일궈내기 시작했다. 소리꾼 장사익의 공연 무대 연출을 비롯해 대전 엑스포 일본관 총감독, 그리고 아테네 문화사절단 총감독 등 굵직한 무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서 무대 공연 연출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석현수 씨의 이러한 행보는 딸 예빈이의 재능이 일찍부터 무대에서 빛을 발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갓난아이 때부터 아내 김미래 씨의 연습실에서 자란 예빈이는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춤을 곧잘 춰 주위 사람들의 예쁨을 받던 재롱둥이였다.그런 예빈이의 천재성을 발견한 것은 서울예술단의 공연 ‘태풍’을 관람한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예빈이는 그저 한 번 보았을 뿐인 춤사위를 고스란히 재연해 내는 것은 물론 어른들도 흉내 내기 힘든 감정의 흐름까지 멋들어지게 살려내는 소름끼치는 연출을 해낸 것이다. 그때 예빈이의 나이 겨우 세 살이었다. 예빈이의 재능은 놀라운 집중력에서 나온다. 하루 12시간씩 엄마의 연습실에서 다른 연습생들 사이에 섞여 누가 시키지 않아도 춤에 미쳐 연습을 거듭하는 데는 부모들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버렸다.최승희연구소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춤 하나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월북 무용수 최승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김미래 씨와 석현수 씨가 뜻을 모아 설립한 곳이다. 월북을 한 덕에 국내에는 그녀의 업적과 명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승희 선생의 춤은 말과 언어, 문화를 모두 빼앗긴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희망의 불꽃이었다. 그런 최승희 선생의 업적이 세월에 묻혀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부부는 우리나라의 동아콩쿠르에 해당하는 중국의 가장 큰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베이징대의 무용가까지 초청해 가며 예빈이를 가르쳤다.갓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무서운 승부욕을 발휘하던 예빈이는 부모의 욕심보다 한발 앞서 모든 것을 해냈다. 그런 기대와 관심 덕분에 2001년에는 온가족이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애틀랜타 초청 공연을 여는 영광을 안게 됐다. 무대 연출은 아빠가, 안무와 지도는 엄마가, 춤과 음악은 예빈이를 비롯한 쟁쟁한 예술인들이 함께하는 자리였다.아들 무현이가 뜻밖의 재능을 발휘한 것도 이 공연에서였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무현이를 혼자 놓아두고 해외 공연을 떠날 수 없어 무현이에게 설장구를 무대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치게 되면 함께 데려가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악기라고는 제대로 배운 적도 다룬 적도 없는 아이가 무슨 수로 석 달 만에 공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겠는가.“딸아이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 상대적으로 아들의 재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못내 가슴 아프고 미안해요. 사내아이는 뭐든 알아서 씩씩하게 잘 해내리라고만 생각했지 아직 어리고 작은 아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거죠.”무현이의 집중력은 실로 놀라웠다.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지만 석 달 만에 대형 공연을 너끈히 소화해낼 만큼의 실력을 갖춰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석현수 씨와 김미래 씨는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컴퓨터 게임에만 미쳐 있던 아들이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찾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예빈이의 천재성에 집중하느라 아들의 재능 역시 남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때문이다. 그런데 무현이의 생각은 달랐다. 그저 취미로 하는 줄로만 알았던 무현이의 실력은 날로 일취월장해 어느 날인가는 서울 타악진흥회가 주최하는 전국타악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왔다. 대회에 나간다는 말도 한마디 없이 덥석 상을 받아와 내미는 아들 녀석의 배포에 깜짝 놀란 것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무현이는 부모의 지원도 없이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가 지원하는 국악 영재로 뽑혀 또 한 번 석현수 씨와 김미래 씨를 놀라게 했다.김미래 씨가 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전이니 부모의 입김이 작용했을 리도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미래 씨는 아들이 본격적으로 국악인의 길로 들어서는 것에 염려가 앞섰다. 국악예술인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높지 않은 국내의 현실을 감안할 때 예빈이처럼 날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커나간다고 하더라도 장래를 보장받기 힘든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들 녀석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무현이는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석현수 씨 가족은 지금 올 3월에 있을 최승희 선생 서거 40주년 기념 음반 제작과 공연 준비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도 아빠가 연출하고, 엄마가 안무를 지도하고, 오빠는 장구를 치고, 예빈이는 춤과 노래를 맡게 된다. 신념과 열정, 그리고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는 가족. 이들의 무대를 기다리는 팬들의 마음 역시 3월의 봄바람보다 더 설레고 풋풋하다.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