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공단

입춘을 코앞에 둔 지난 2월 2일. 영동 고속도로 월곶인터체인지를 나와 시화산업단지로 향하는 해안도로는 대낮에도 바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시화산업단지(통칭 시화공단)는 언뜻 보기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하지만 차를 몰고 공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크게 세 가지가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첫째, 현수막이 눈에 띄게 많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에는 ‘공장급매’ ‘임대공장 다량 확보’ “100평 200평 300평짜리 공장 다수‘ 등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런 현수막은 사거리마다 네 모퉁이에 어김없이 있었다.군자천과 옥구천 등 개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입구에는 ‘공장 매물 전문 ○○부동산’ 등과 같은 부동산 중개업소 연락처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공장을 팔거나 임대하려고 내놓은 공장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공단 내 M사에 들어서자 공장 안에는 제작하다가 중단된 기계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이 회사의 K 사장은 “기계를 주문받아 제작하다가 갑자기 보류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세워둔 것들”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이들 기계는 특수 용도의 주문 제작품이기 때문에 다른 제품으로 개조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발주자의 사정을 뻔히 아는 마당에 대금을 청구할 수도 없어 자금난만 가중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평상시 발주를 받아 제작하다가 중단됐다면 당연히 기계 대금을 청구했을 텐데 100년 만에 올까 말까 한 글로벌 금융 위기가 엄습한 마당에 그럴 형편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주자가 “일단 제작을 보류해 달라”고 요구해 온 데다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거래해 온 업체여서 그럴 수가 없다. 이 회사의 프레스 밀링 선반 등 다른 공장 기계들 위에도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일감이 70~80%가 줄었지만 그렇다고 평생 동고동락해 온 직원들을 내보낼 수도 없어 한 달에 3000만~4000만 원씩 손해를 보면서 공장 문을 열어놓고 있다”고 K 사장은 설명한다.이 회사의 울타리 안에는 큰 공장과 작은 공장이 있는데 작은 공장은 임대를 놓은 상태다. 하지만 이 임대 공장은 벌써 몇 달째 일감이 없어 세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날도 하루 종일 직원 1명이 기계 설비를 지키고만 있었다.이웃에 있는 또 다른 기계 공장은 몇 달 전 아예 문을 닫았다. 10여 명의 직원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다. 이 공장은 매물로 나와 있지만 사려는 사람이 없다. 이 회사의 L 사장은 3년 전 창업했다. 당시 종잣돈 2억 원과 은행 대출금 18억 원을 합쳐 20억 원으로 공장을 사서 가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행 대출금이 엔화 대출이어서 원리금이 거의 2배로 늘어난 데다 경기 침체로 일감도 없어 직격탄을 맞았다.둘째, 도로에는 화물차의 통행이 드물었다. 대낮의 공단은 승용차보다는 화물차가 질주하는 게 통례다. 그런데 대낮에도 화물차가 다니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북적북적한 공단의 모습과는 달리 정적마저 감돌았다. 대신 시화공단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군자천 옆에는 수백 대의 빈화물차들이 주차돼 있었다. 화물을 가득 싣고 숨 가쁘게 질주해야 할 8톤 트럭, 12톤 트럭, 25톤 트럭, 대형 지게차 등이 화물이 없어 도로 양쪽으로 무려 1km가 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시화공단 업체를 대상으로 화물 운송 주선업(소개업)을 하는 세기통운의 이인성 사장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는 그나마 수출 물량이 있어 전체 물동량은 30%가량 줄어드는데 그쳤지만 요즘은 60~70%가 감소한 상태”라고 설명한다.화물 운송을 하는 K 씨는 경기가 나빠지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25톤 트럭을 팔고 5톤 트럭으로 바꿨다. 그는 “큰 트럭에 적재할 물량이 별로 없어 도저히 채산을 맞출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셋째, 공단 내 식당가엔 저녁 손님이 완전히 끊긴 상태다. 공단 내 중심 상업지역인 파인힐 상가 내 음식점인 장수골의 배미자 사장은 “10년 동안 이 지역에서 장사를 해 왔지만 저녁 손님이 이렇게 없기는 처음”이라며 “몇 년 전까지는 저녁 회식으로 보통 10개 팀 이상을 받았는데 요즘은 단 한 팀도 없다”고 설명한다.가동률 저하로 야근이라는 말이 사라지면서 이 지역 중견 기업의 식당을 맡아 운영하는 P 씨 역시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중식과 석식을 제공해야 겨우 수지타산이 맞는데 잔업이 사라지면서 석식이 없어져 식당 매출이 반 토막 났기 때문이다.시화공단은 총 7085개사가 입주해 있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중소기업 공단이다. 입주사를 기준으로 할 때 인근 반월공단의 3854개사보다 84%나 많고 남동공단의 4912개사에 비해서도 44%나 많다. 시화공단에는 자동차 부품, 기계 전자 부품, 화학, 제지 업체들이 골고루 입주해 있다.한국산업단지공단이 집계한 시화공단의 작년 11월 중 평균 가동률은 70.7%였다. 산업단지공단은 조사 시점과 통계 작성 후 발표 시점과의 간격 때문에 통상 두 달 전 가동률을 발표한다. 하지만 올 들어 경기가 급랭하고 있어 공단 입주 업체들이 느끼는 체감 가동률은 이미 50~60% 수준으로 급락한 상태다.요즘 이곳에 낀 바다 안개는 이 지역의 암울한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밤에도 기계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인근 오이도 횟집에 활기가 넘치는 봄은 과연 언제 올 것인가.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