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날 술을 거하게 드셨다고 한다. 장녀인 나의 탄생은 아버지의 한숨과 함께 시작되었다.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기저귀 한 번 갈아주지 않았던 분이지만 지금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랑하는 내 아버지다.모 대학의 유도학과 출신인 아버지의 이력은 대단하다. 싸움판이 벌어지면 언제나 이기고 힘도 장사여서 충북 단양에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단다. 올림픽 시즌만 되면 TV를 바라보며 가족들에게 감독 출신 후배들 자랑에 바쁜 아버지의 직업은 장사꾼, 아니 사업가였다. 학창 시절 과일 장사를 하는 부모님의 직업을 써 오라고 할 때마다 어린 마음에 어떻게 멋지게 써 내야 하나 고민할 때면 아버지는 늘 ‘사업가’라고 쓰라고 일렀다. 그게 사실인데도 어린 마음에 과일 장수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 거짓 같아서 죄짓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사업가로서의 아버지는 쌀 한 가마니 들고 서울로 올라와 막노동에서부터 신발 장사, 그리고 과일 장사까지 참으로 많은 사업으로 우리 가족을 부양해 왔다. 늘 조그만 방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우리 가족에게 초등학교 3학년 때 앞마당이 있는 집이 생길만큼 아버지의 사업 수단은 대단했던 것 같다. 거리 판매에서 시작해 도매업 과일 판매로 그 판매망을 구축해 나갔던 아버지의 힘은 주변 사람, 즉 인맥 관리였다. 과하리만큼 긍정적인 아버지는 어디서든 인정받고 사람들이 당신을 찾게 하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물론 보증 때문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럴 때도 아버지는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며 입 나온 어머니를 다독이곤 했다. 어느덧 시집갈 때가 되니 딸 이미지 생각한다며 과일 장사에서 대리점 사업으로 전환한, 조금은 소심하고 착한 아버지는 현재 내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정신적 도움을 준 선배 사업가이자 가장 고맙고 존경스러운 분이다.나는 어릴 때 친할머니 댁에 가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시골에서의 어떠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같은 자리에서 함께 식사도 할 수 없고 토끼나 꿩을 잡으러 갈 수도 없고, 단지 어머니 곁 부엌에서 소꿉놀이하는 것이 심심했었는지, 남동생이 시골에 갈 때 내가 외할머니 댁에 맡겨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내려가는 것이 불편했었던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건 딸이 기죽을까봐 10남매 중 차남인 아버지는 시골의 가풍(?)을 바꿔보기 위해 유난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올라갈 때 쯤 내게도 어른들과 한방에서 식사할 수 있는 영광이 돌아왔고 오빠들이 가끔 쇠등을 태워주기도 하고 낚시하는 데도 데리고 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상처받았을 딸을 위해 아버지는 예전의 권위적인 모습을 버리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연년생인 내 남동생이 누나 이름을 부르거나 무시하면 엄하게 꾸짖었고 누나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여러 모로 챙겨 주었던 것 같다.이런 아버지는 참으로 운이 없다. 내게는 너무나 강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한파가 몰아칠 때 암 선고를 받았다. 1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통보는 모든 가족을 놀라게 했다. 항암 치료로 음식을 입에 넣기 힘들 정도인 암 병동의 다른 환자들과 달리 아버지는 보신탕을 찾으셨다. 대부분 삼키지 못하는 양이 더 많았고 맛을 느낄 수 없었지만 살아남은 1% 사람이 당신이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여느 때처럼 호언장담하며 자신감을 보였던 아버지. 우리 병실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울며 찾아 온 친지들께는 유머로 화답하며 걱정 말라고 호언장담하던 아버지도 할머니 앞에서는 어머니의 아들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처음으로 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함께 웃고 울던 병실의 환자가 하나둘 떠나갈 때도 아버지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늘은 들어주었다.긍정의 힘으로 최악에서조차 우리를 웃게 해 준, 자식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다. 문득 내 딸의 기저귀를 갈아 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고객 만족 서비스 컨설팅 및 교육 전문 업체 (주)예라고 대표. 친절 강대국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 아래 10년 째 ‘예라고 하겠습니다’라는 긍정적인 서비스 교육 사업을 하고 있는 그는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 선발 심사와 자문을 맡았고 현재 국제이미지컨설턴트한국협회(AICI KOREA) 회장과 서울여대 경영학과 겸임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