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

‘왜 한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같은 기업이 나오지 않나?’ 이용태(76) 전 삼보컴퓨터 회장(창업자)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새삼 밀려드는 안타까움으로 또 한 번 가슴이 먹먹해진다. 미국에서 통계물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자계산기운영실에서 근무하던 이 전 회장은 1971년 인텔의 대규모직접회로(LSI) 개발 소식을 듣고 ‘정보기술(IT) 혁명’을 직감했다. 정보화 시대만큼은 한국이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았다는 생각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정부 설득에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1975년)와 애플(1977년)이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그러나 “연구원 100명만 주면 당장 세계 최고의 컴퓨터 회사를 만들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이 전 회장은 1980년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삼보컴퓨터를 직접 창업해 그룹 매출 4조 원대의 대기업으로 키워 냈다. 하지만 국내 나스닥 직상장 1호였던 자회사 두루넷이 2003년 어이없이 무너지면서 그의 꿈도 깨지고 말았다. 경영 은퇴 후 ‘인성 교육 전도사’로 나선 이 전 회장을 지난 1월 21일 성균관대 근처 사무실에서 만났다.처음부터 사업할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지요. 설득하다 안 돼 직접 나서게 된 거예요. 1969년 말에 귀국해 이듬해부터 과학기술연구소 전자계산기운영실 연구원으로 일했어요. 컴퓨터 역사에서 1971년은 굉장히 중요한 해지요. 인텔이 LSI로 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세계 최초로 내놓았어요. 손톱만한 칩 위에 컴퓨터의 기능을 넣은 겁니다. 그것으로 굉장한 산업적 변화가 일어나겠다는 걸 직감했지요. 대부분 장난감에나 쓰이는 것 아니냐는 냉담한 반응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장차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당시는 4비트짜리 유치한 수준이지만 집적도가 늘어나 슈퍼컴퓨터의 능력을 가질 게 분명했어요. 한국이 그때 앞서 나서기만 하면 세계를 선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열심히 정부를 설득하러 다녔어요.그건 산업의 역사를 보면 답이 나와요. 1946년 1세대 대형 컴퓨터가 처음 상용화됐는데, 그때도 기존 전자공업의 거인들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IBM, 유니백, CDC 같은 신흥 회사들이 등장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갔지요. 1960년대 2세대 미니컴퓨터가 나올 때도 똑같았어요. 이미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1세대 컴퓨터 기업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DEC, 데이터제너럴, 프라임 등 새로운 기업군이 등장해 이끌었어요. 저는 1960년대 미국 유학 시절에 미니컴퓨터 등장을 지켜봤기 때문에 마이크로컴퓨터의 탄생이 우리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걸 확신한 겁니다.정부에 연구원 100명만 달라고 했지요. 그 시절 100명이면 당장 세계에서 가장 큰 컴퓨터 회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어서면 한국이 컴퓨터에서는 세계 최초,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설득했어요. 지금 돌이켜 보면 무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부에 가서 말하면 ‘무슨 꿈같은 이야기냐’고 했어요. 한국의 전자공업이 유치한 수준일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당시 금성사(현 LG전자)가 가장 규모가 컸고, 삼성은 막 전자공업을 시작할 때였지요. 대기업에도 찾아다니며 열심히 설득했어요. 연구원 100명의 인건비만 지원해 주면 세계 최고의 컴퓨터를 만들어 내겠다고 했지요. 대기업도 제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르는 말 하지 말라’는 식으로 훈계를 들어야 했어요. 한국은 내수시장이 없어 수출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3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우선 1단계로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하고, 2단계로는 국내 시장에 팔아보며 기술을 확립해야 하고, 그다음 마지막으로 수출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최신 컴퓨터 기술을 한국에 줄 리가 없고 국내 시장까지 없으니 말도 안 된다는 논리였어요. 그러면 좋다, 내가 직접 해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 거죠.10년 동안 여기저기 열심히 설득하고 다니다 포기하고 창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마침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이었어요. ‘나가서 정보통신 기업 100개를 만들겠다.’ 그렇게 약속하고 연구소를 그만두었지요. 당시 대량 해직으로 실직자가 된 공무원들이 많았어요. 1000만 원씩 10명이 모으면 1억 원이고, 그러면 회사 하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YMCA 호텔에 방을 하나 얻어 인큐베이션 룸으로 삼았어요. 제일 먼저 컴퓨터 하드웨어를 만드는 삼보컴퓨터와 컴퓨터를 판매하는 엘렉스, 하드웨어 기술 개발 업체 큐닉스, 소프트웨어 업체 한국소프트웨어연구소(KSI), 컴퓨터 인력을 키우는 코콘 등을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기업군으로 출발한 겁니다. 그 후로도 힘이 닿는 대로 회사를 계속 만들어 나갔어요.두루넷이 바로 그런 경우였어요. 1996년 두루넷은 한국전력이 깔아 놓은 광통신망 독점권을 얻어 세계 최초로 브로드밴드 인터넷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도 한국통신이나 정부는 불가능하다고 반대했지만 과감하게 뛰어들어 한국을 브로드밴드 인터넷 1등 국가로 올려놓은 것 아닙니까. 세계 어느 나라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때 시작해 가입자 100만 가구를 확보하니까 한국통신과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이 가세해 저가 공세를 편 거죠. 두루넷은 망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브로드밴드 인터넷 강국이 된 겁니다.하루는 박태준 전 회장이 포스코가 향후 산업화 시대에 철강으로 했던 역할을 정보화 시대에도 하려고 하니 나보고 도와 달라고 만나자고 해요. 박 전 회장 말씀이 이래요. ‘광양제철소가 완공되면 포스코 설비 확장은 사실상 마무리된다. 그런데 포스코 순이익이 매년 2조 원 정도 남는데 그중 1조 원씩을 10년간 IT에 투자하겠다. 포스코 내에 이 일을 맡아 할 사람이 없으니 이 회장이 맡아 달라.’ 정말 깜짝 놀랐어요. 꿈인가 싶었죠. 아무 조건 없이 하겠다고 그랬어요. 63빌딩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사무실을 하나 마련해 줬어요. 바로 1990년대 초반이었지요. 그런데 참 불행한 것이 정치권에 있던 박 전 회장이 김영삼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갈등을 빚다 결국 일본으로 나가면서 이 일을 직접 챙기지 못했어요. 밑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책임지고 나서려 하지 않았어요. 결국 준비 중인 이동통신 사업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으면 그때 검토하자는 식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박 전 회장을 직접 만났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어요. 요즘도 박 전 회장을 만나면 서로 책상을 치며 통탄합니다. 정말 기가 막힌 기회를 놓친 거죠. 국가를 위해서나 포스코를 위해서나 안타까운 일이지요.저는 한국이야말로 ‘기업가 정신의 나라’ ‘벤처 정신의 나라’라고 생각해요. 그건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일본과 한번 비교해 보죠. 일본은 과거 봉건시대에 270여 개의 작은 나라로 갈라져 있었지요. 엄격한 계급제도 때문에 신분 이동이 불가능했어요. 칼 만드는 사람은 일생 동안 죽자 사자 칼만 만들어야 했지 다른 것을 할 생각은 못했어요. 신분 차가 워낙 커 칼 한 번 잘못 만들면 목이 달아났어요. 지금도 일본 종업원들은 맡은 것 하나만 죽자 사자 열심히 해요. 수백 년 동안 그런 문화가 축적된 겁니다. 반면 한국은 958년 고려 광종 때 중앙집권화가 됐어요. 과거제도가 도입돼 관리를 중앙에서 뽑아 지방에 파견하는 등 지방 호족의 권력을 모두 빼앗았지요. 과거제도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뒷배경이 없어도 정승·판서가 될 수 있게 됐어요. 정승 아들이 정승이 되는 게 아니라 똑똑하면 누구나 정승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한국 사람들은 누가 잘 돼도 ‘나라고 왜 못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저녁에 주택가를 한번 보세요. 네온사인 십자가가 숲을 이루고 있어요. 목사도 남 밑에서 안 해요. 전부 자기가 차려 직접 하려고 하지요.한국 사람은 타고난 벤처 기업가예요. 벤처 정신은 있는데 2000년대 초 벤처 거품이 터지면서 막대한 피해를 봤기 때문에 한동안 움츠러들고 있는 거죠. 하지만 결국은 벤처가 산업을 살리고 고용을 창출하는 근본이기 때문에 이를 다시 활성화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벤처 산업이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먼저 마련돼야죠.1933년 경북 영덕 출생. 57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69년 미 유타대 통계물리학 박사. 64년 이화여대 교수. 73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전자계산기운영실 실장. 78년 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 82년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89년 삼보컴퓨터 회장. 96년 두루넷 회장. 98년 숙명학원 이사장(현). 9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2007년 볼런티어21 이사장(현).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