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다 창업가문의 실험

요즘 일본 경영계의 최대 화제는 도요타자동차의 ‘사장 교체’다. 도요타가 와타나베 가쓰아키(67) 사장 후임으로 창업자 직계인 도요다 아키오(52) 부사장을 승진시키기로 내정한 것이다.일본 최대 회사이기도 한 도요타는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1500억 엔(약 2조2500억 원)의 영업 적자를 낼 전망이다. 창업 이후 사실상 첫 영업 적자다. 이에 따라 자동차의 생산량을 줄이고 공장 신·증설을 보류하는 등 설비 투자도 대폭 축소하고 있다.그런 도요타자동차가 오너 경영 복귀로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도요타가 과연 이 승부수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지에 일본 경영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도요타자동차는 지난 12일 도요다 쇼이치로(83) 명예회장, 오쿠다 히로시(76) 상담역, 조 후지오(71) 회장, 와타나베 사장 등 최고위 경영진 4명이 참석하는 최고 간부회의를 열고 아키오 부사장의 차기 사장 내정을 사실상 추인했다. 이에 따라 아키오 부사장은 내년 6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사장으로 정식 선임될 예정이다. 와타나베 사장은 부회장을 맡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도요타자동차에서 창업자 가문 출신이 사장에 오르기는 아키오 부사장의 숙부였던 도요다 다쓰로(79) 전 사장이 1995년 사장에서 퇴임한 이후 처음이다. 도요타그룹 내에서 ‘천황’과 같은 존재인 창업가 일족은 다쓰로 사장을 끝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오쿠다 상담역, 조 후지오 명예회장, 와타나베 사장 등 전문 경영인이 3대째 대표이사 사장을 맡아왔다.이 때문에 아키오 부사장의 사장 승진에 따른 창업가 출신의 경영권 복귀를 놓고 일본 언론에선 ‘다이세이 호칸(大政奉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이세이 호칸은 에도(江戶)시대 막부의 마지막 쇼군(將軍)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정국 혼란기인 1867년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한 사건을 일컫는다.아키오 부사장은 일본 재계 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을 역임한 쇼이치로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창업자 4세다. 2000년 44세의 나이에 이사로 발탁된 뒤 2002년 상무, 2003년 전무를 거쳐 2005년 부사장에 오르는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이사 취임 이후 주로 중국 사업과 조달 부문을 담당하다가 부사장 취임 후에는 국내 영업에 해외 판매·생산을 관장하며 사장 취임에 대비해 왔다.그의 사장 승진은 사실 시기의 문제일 뿐이었다. 오래전부터 예고돼 왔던 일이다. 부친인 쇼이치로 명예회장이 57세에 사장에 취임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몇 년은 더 사장 수업을 쌓을 것이란 관측이 일반적이었다.그러나 일반의 예상보다 아키오 부사장의 사장 승진이 빨라진 것이다. 아키오 부사장의 사장 승진 얘기가 일본 재계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작년 가을부터다. 아키오 부사장의 아버지인 쇼이치로 명예회장이 일본 재계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앞으로 아키오를 잘 부탁한다’고 얘기하면서 그의 ‘승진설’이 돌았다.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터진 9월 전후였다.복수의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쇼이치로 명예회장은 재계 지인들은 물론 정치인 관료들을 만나면 ‘아키오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니 많이 도와 달라’는 얘기를 진지하게 했다고 한다.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아키오 부사장의 경영권 승계가 임박했구나’라는 감을 잡기에 충분할 정도였다.도요타 내부 소식에 밝은 한 기업인은 이렇게 풀이했다. “도요타 사장 인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쇼이치로 명예회장은 올해를 아들인 아키오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적기로 판단한 것 같다. 83세인 쇼이치로 명예회장은 그나마 자신이 건강할 때 아들에게 경영권이 확실히 승계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 물러나는 전문 경영인인 와타나베 사장도 섭섭하지 않게 대우해 줄 기회가 금년에 있다. 오는 6월 조 후지오 회장이 임기 만료로 게이단렌 부회장에서 물러나는데, 거기에 와타나베 사장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도요타가 14년 만에 창업가 출신을 사장에 앉힌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나오는 게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에서 책임 있는 오너 경영자가 나서 회사의 구심력을 높이고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도 있다. 도요타가 창업 이후 첫 영업 적자를 내는 등의 위기 상황에서 창업가 출신을 사장으로 올린다는 것은 ‘지금이 바닥’이란 판단을 했다고 해석된다.일본 재계 전문 잡지인 ‘자이카이(財界)’의 무라다 히로부미 주간의 분석이다. “쇼이치로 명예회장 등 창업가 오너들이 아키오 부사장에 대한 경영권을 넘기는 시기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을 원칙이 있다. 바로 ‘아키오가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엔 반드시 실적이 좋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창업가 출신이 경영을 승계했더니 도요타 실적이 더 나빠졌다’는 평가를 받았다가는 앞으로 창업가 출신의 경영 참여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세계 경제와 자동차 시장 전망, 도요타의 예상 실적 등을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는 6월 아키오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기로 했다면 도요타의 핵심부는 그때를 ‘바닥’으로 판단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도요타는 금년 하반기부터는 세계 자동차 경기가 서서히 회복세를 탈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실제 도요타자동차 내부에서도 아키오 차기 사장이 창업자 직계로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도요타 특유의 ‘마른 수건 쥐어짜기’식 경비 절감과 생산 거점 통폐합 등 각종 개혁을 단행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일본 언론에서는 창업가 일족이 최고 경영 포스트에 복귀하는 것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의 시각을 보내고 있다. ‘제왕적 오너’의 강력한 구심력을 바탕으로 신속한 의사결정과 사내 결속을 기할 수 있는 효과가 기대되는 반면 기업 통치의 투명성을 흐려 장차 경영을 불안하게 할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도요타자동차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취임하는 아키오 사장이 경영 수완을 발휘하지 못하고 실적이 더욱 악화될 경우 도요다가의 몰락을 초래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 아직 52세의 젊은 나이로 경험이 부족한 아키오 부사장에게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에 직면한 도요타의 운명을 맡기는 건 무리라는 지적도 없지 않다. 또 누가 사장이 되더라도 금년엔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데, 그런 악역을 젊은 아키오 부사장이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있다.일본에선 창업가 출신의 경영자가 실패한 사례가 최근에도 있었다. 산요전기의 경우다. 창업자의 장남인 이우에 사토시(76)가 1986년 사장 취임 후 ‘톱다운’ 경영으로 중국 가전업체와 제휴를 결정하는 등 한때는 능력 있는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경영에 실패해 2000년 회사가 경영난에 빠진 데다 배당금 분식 결산까지 들통 났다. 이 때문에 2007년 당시 사장이었던 그의 장남을 포함해 창업가 일족이 창업 60년 만에 경영 일선에서 쫓겨났다.산요전기는 최근 주요 채권은행들에 의해 파나소닉(옛 마쓰시타전기)에 팔렸다. 이에 비해 파나소닉은 창업가 출신과의 갈등으로 1990년대에 부진을 겪었으나 공채 출신인 나카무라 구니오(67) 현 회장이 2000년 사장에 취임한 후 ‘성역 없는 개혁’으로 수익을 대폭 회복시킨 뒤 2선으로 물러났다.개혁의 바통을 이어받은 오쓰보 후미오(61) 사장은 작년 10월 회사명과 브랜드에서 90년 만에 창업가 성인 ‘마쓰시타’를 모두 지우고 파나소닉으로 통일했다. 파나소닉에는 현재 창업가 일족이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다. 혼다자동차도 창업자인 고 혼다 쇼이치로 씨가 “사원이라면 누구라도 사장이 될 수 있다”며 자식들을 회사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유명하다.어쨌든 도요타자동차는 ‘오너 경영 복귀’를 선택했다. 이제 도요다 아키오 차기 사장의 두 어깨에는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인 도요타자동차와 도요다 창업 가문의 명운이 나란히 오르게 된 것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