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커버린 아들 녀석이긴 하지만, 난 지금도 내 말을 거스르거나 내 기준에 빗대어 잘못됐거나 어리석은 짓을 한 것으로 여겨지면 내 성질을 못 이기고는 가차 없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우선 야단을 치고 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얼마 가지 않아 내 속 좁음에 후회하게 된다.그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에게는 과거의 내 잘못을 관대하게 참고 기다려 주신 그 너그러움과 관용 때문에, 그리고 내 아이에게는 내 속 좁음과 다급함에 미안해지곤 한다.나는 크면서 아버지에게 매를 맞거나 큰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오해 마시길, 난 ‘엄친아’ 타입 하고는 거리가 먼 그런 아이였으니까.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늘 수수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거의 매일 나를 추격하시곤 했다. 어머니의 빗자루를 피해 밖에서 몇 시간 서성이다가 배가 고파지면 슬며시 들어가 밥상에 앉아도 아버지는 이런저런 큰 말씀이나 꾸지람은 없으셨다.1940년대 중반, 당신 나이 이십 초반에 보리쌀 두어 말 지고, 그 당시로는 오지인 충북에서 인천으로 오셔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70여 년을 같은 자리에서 사셨다.내가 태어났을 즈음에는 아버지 사업이 번창해 가세가 꽤 괜찮았고, 자연히 우리 집은 공장 일꾼들과 시골에서 온 민원 손님들로 늘 북적거렸다. 민원이라고 해봤자 주로 취직 문제, 금전 문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좀 사는 사람들은 고향 분들의 민원 해결사 역할도 해야만 동향 사람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그분들은 며칠씩 머무르면서 민원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시고는 했는데, 나는 그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했다. 그 당시엔 내가 아무리 미운 짓을 해도 아버지 어머니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인 나를 감히 어떻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미운 털 박힌 아이가 됐고, 덕분에 유년기와 초등학교 시절 나는 공부 못하고 말썽 많은 소위 문제아였다. 덕분에 어머니께서는 유난히 학교 구경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그 이후로도, 고등학교 3학년 예비고사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시기에, 암벽 등반에 미쳐 친구 집에 공부하러 간다고 핑계대고 정작 그 친구 집에는 교복만 살포시 벗어놓고 산에 갔다 들킨 일, 고등학교 졸업식 날엔 친구 녀석들과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 숙직실에 모여 소주를 마셨는데, 친구 녀석 둘이 싸움이 붙어 가는 목재로 만든 반제품이 쌓여 있던 창고를 엉망으로 뭉개버린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대학 시절 여름방학만 되면 무작정 배낭 메고 나가 중간 중간에 “아사직전이니 차비 보내주면 바로 가겠다”고 몇 번이나 거짓말로 송금을 받아가며 한 달여가량을 버티고 돌아다니다 거지 행색을 하고 들어갔을 때에도,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지금 내가 내 아이에게 하는 정도의 격한 감정 표현은 하지 않으셨다.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아들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커가는 아들의 성장통 정도로 치부하시고 어려서는 사랑으로, 조금 더 커서는 믿음으로 기다려 주신 너그러움과 관용 덕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한 그 덕분에 나도 자라면서 그리 크게 모나지 않게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그런 아버지와 내 아들의 아버지로서 나를 비교해 보면 아버지에게는 감사한 동시에 죄송스럽고 반면 내 아이에게는 그런 믿음과 너그러움을 보여주지 못해 한없이 민망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 아이 역시 내가 앓았던 커가는 성장통을 앓아가고 있는 것일 뿐임을.닮은 부자지간을 종종 붕어빵이라고 하던데, 난 붕어가 한 점도 들어가지 않은 맛대가리 없는 붕어빵인가 보다. 내 나이 벌써 50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데, 더 늦기 전에 붕어가 안된다면 피라미라도 한 마리 건져 넣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경제 한파에 오랜만에 보는 매서운 겨울 날씨. 이런 날에는 그 옛날 어릴 적 겨울, 식구들끼리 아랫목 이불 속에 발 묻고, 아버지가 사 들고 온 군것질거리를 먹던, 아무 근심도 없던 하얀 어린 시절의 겨울밤이 한없이 그리워진다.1956년 인천 출생. 인하대 화공과 졸업. 2003년 바이엘 코리아 화학 사업부 총괄 책임자, 2007년부터 독일 소재 화학회사 랑세스 코리아(유)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