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서는 러시아 정치 지도자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정치적 부자(父子)’로 회자되는 사이다.같은 대학(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같은 학과(법학과)를 졸업한 이들이 정치적 부자의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법학박사 학위를 갓 취득한 메드베데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보좌관이던 대학 13년 선배 푸틴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이후 둘은 말 그대로 ‘콤비 플레이’를 펼쳤다. 메드베데프는 푸틴이 총리가 되자 내각 사무실장으로, 대통령이 되자 크렘린 행정실장으로 따라다니며 푸틴을 보좌했다.메드베데프를 러시아연방 제5대 대통령으로 앉힌 것도 다름 아닌 푸틴이다. 국민들의 전폭적인 인기 속에 임기를 마친 푸틴 대통령이 다음 정권에서 총리에 취임한 뒤 사실상 ‘수렴청정’하기 위해 심복인 메드베데프를 후임 대통령직에 앉힌 것이다. 모스크바 정계에선 ‘메드베데프는 얼굴 마담일 뿐 실제 대통령은 푸틴’이란 얘기가 공공연히 돌았다.이런 둘 사이에 최근 이상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정부의 경제 위기 대응책이 지지부진하다며 푸틴 총리를 겨냥한 듯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푸틴 총리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 행보를 보이려고 하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푸틴 총리에게 또 한 차례 일격을 가했다”고 해석했다.실제로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독자 노선의 강도를 높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지난해 7월 푸틴 총리가 러시아 석탄 업체 메첼의 탈세 목적의 가격 담합 혐의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촉구한 뒤 이 회사 주가가 30% 넘게 급락하자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측근인 이코르 유르겐스 러시아 현대개발연구소 소장이 “푸틴의 발언으로 600억 달러의 손해를 봤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지난해 8월 러시아와 그루지야 간 전쟁 때는 푸틴 총리가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제치고 그루지야 전쟁을 주도해 갈등을 빚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에도 “국내에서 발생한 사안들과 중요한 정책 결정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은 본인이 스스로 감당하며 누구와도 책임을 분담하지 않을 것”이라며 푸틴 총리를 겨냥한 ‘작심 발언’을 내뱉었다.메드베데프의 이 같은 행보는 푸틴의 ‘추락’과 맞물려 있다.미국발 금융 위기가 러시아까지 강타하며 한때 국부(國父)로까지 추앙되던 푸틴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진 중고차 수입 관세 인상 항의 시위에 푸틴 총리를 모독하는 포스터가 등장했는가 하면 그의 사임을 촉구하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라디오 등에서 정치 평론가들이 푸틴을 공개 비난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푸틴은 지난해 11월 산업 생산이 급락한 이유를 설명하라며 총리 취임 이후 처음으로 공산당으로부터 의회 출석을 요구 받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 같은 휘발성 높은 정치 투쟁은 차기 대통령을 둘러싼 ‘전초전’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러시아 국가 두마(하원)는 최근 대통령 임기를 현행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두 사람이다.이는 푸틴의 장기 집권을 위한 사전 작업이며 조만간 푸틴이 대통령에 복귀할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메드베데프가 올해 조기 사임하고 푸틴이 연말 대선 전까지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다가 대선에서 승리해 푸틴이 2010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한다는 시나리오다. 이럴 경우 푸틴은 연임을 포함하면 최대 2022년까지 권좌에 앉을 수 있게 된다.반면 일각에선 시간이 지나면서 메드베데프가 푸틴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양측의 갈등이 첨예하게 맞붙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임기를 모두 채우고 임기 연장 안의 첫 수혜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그는 2018년까지 10년간 대통령을 할 수 있다.메드베데프 대통령-푸틴 총리 간 ‘양두(兩頭) 체제’의 균열은 결국 ‘하늘 아래 두 태양은 없다’는 정치권 생태계의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사건이란 평가다.유병연·한국경제 기자 yooby@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