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부모가 되면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모두 표현하지 못하지만 자식들에 대해 느끼는 안쓰러움과 아슬아슬한 기분, 그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부모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그러나 나는 부모가 되어서 아버지를 더욱 원망하게 됐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듣는 수재였다고 한다. 남들보다 많이 배운 고학력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삶은 집에 쌀이 떨어져 자식들이 굶고 있어도 남은 잔돈을 다 털어 담배를 사버리는 사람이었다. 물론 때때로 하는 일이 잘돼 지갑이 두둑해질 때면 우리 형제들에게 후한 용돈을 주기도 하고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이 가보지 못하는 레스토랑에 데려가 외식을 시켜 주기도 했다.우리 집은 언제나 예측 불허였다. 화창한 봄날 아무 예고 없이 번개 폭풍이 치는 일들이 반복됐다. 2층집에 살다가 갑자기 여관에서 몇 달씩 지내기도 했고, 자가용을 타고 여행을 다니다가도 동네 쌀집 주인이 밀린 외상값을 받겠다고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아버지는 언제나 내일을 믿는 사람이었다. 내일은 일이 잘돼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 덕에 우리 형제들은 학창시절 공납금을 제때 내 본 적이 없다. 나는 내일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가지며 성장했고 돈에 대해 가난한 마음을 키우며 자랐다.부모가 되고 나서 나의 이런 성장 과정은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했다. 돈에 대한 가난한 마음 때문에 돈이 있으면 다 써버리고 없으면 곤란을 겪는 아버지와 비슷한 경제적 시행착오를 호되게 치렀다. 그러나 내가 가졌던 어릴 적 절망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 때문에 뒤늦게 돈에 대해 성실해지는 연습을 꾸준히 하게 됐다.그래서 나는 가계부를 쓴다. 대박을 바라는 재테크에 비판적이고 요행을 바라며 미래를 막연히 낙관하는 것에 경계심이 강하다.지금 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져 5년째 요양원에 누워 있다. 쓰러지기 전 아버지는 책을 한 권 출간하셨다. 천도교와 관련된 전문 서적이었다. 출간 후 대학에 간간이 강의를 나가시기도 했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아버지의 삶이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가족들도 모두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과신과 주위의 과도한 기대심으로 인해 자기 삶에 대한 뚜렷한 좌표 없이 표류하다가 짧은 행복을 마치고 결국 불행한 노후를 맞게 됐다.나는 ‘아버지의 가계부’란 책을 썼다. 그 책에 나오는 아버지는 실제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아버지다. 평생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맞게 된 경제적 한파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가계부를 집어든 사람이다.가계부에 한 줄 한 줄 돈의 기록을 이어가며 가족을 더 이상 경제적 한파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일상의 치열함을 쌓아가는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평범한 듯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강한 아버지이고 돈에 성실해지는 시간 속에서 제대로 행복해진 아버지다.내 책속의 아버지는 그렇게 자식들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긴 사람이다. 내가 그 책을 쓰게 된 것은 2006년 거세게 몰아친 재테크의 광풍에 대한 우려감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돈은 무엇이며 돈으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대박 재테크가 한창인 시대에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돈이 많은 부자 아빠가 되기보다 낡은 가계부에 쌓여 있는 경건한 기도와 같은 아버지의 삶이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화를 쌓아오며 살았던 나의 지난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나는 가계부를 쓰는 아버지를 만들었다.그리고 책 속의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에게 감사함을 갖게 됐다. 결국 조금도 존경할 구석이 없던 아버지가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가계부를 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이제는 평화로운 얼굴로 요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 나도 결국 그 아버지로부터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셈이다.제윤경·에듀머니 대표가계 재무 전문가. 경제 교육 전문 업체인 에듀머니 대표를 맡고 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돈을 성실하고 합리적으로 벌어 관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아버지의 가계부’ ‘나의 특별한 소방관’ ‘한국의 가계부 부자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