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소주시장 진출 파장

‘유통 거인’ 롯데그룹이 두산의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을 인수하기로 함에 따라 국내 소주 업계의 ‘절대 강자’ 진로와 롯데의 한판 격돌이 예상된다.두산은 2008년 12월 22일 두산 주류BG 매각 입찰에서 참여업체 5개사 가운데 롯데칠성음료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두산과 롯데는 이르면 2008년 내 협상을 마무리 짓고 2009년 초 본계약을 맺고 3~4주간 실사를 거쳐 2월 말께 매각 작업을 마무리 지을 방침이다. 인수 금액은 5000억 원 내외인 것으로 전해졌다.두산 주류BG는 진로의 ‘참이슬’과 경쟁하는 ‘처음처럼’을 비롯해 ‘산’ ‘그린’ 등 소주 브랜드와 와인 ‘마주앙’ 등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소주 시장에서는 ‘참이슬’에 이어 업계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 3419억 원, 영업이익은 214억 원을 올렸다. 국내 최대 유통그룹 롯데가 소주 시장에 진출함에 따라 이 시장의 ‘터줏대감’ 격인 진로와 롯데의 한판 ‘술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게 됐다.국내 소주 시장은 ‘참이슬’과 ‘J’를 앞세운 진로가 전체 시장의 절반이 넘는 51%의 점유율로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진로는 탄탄한 영업망을 통해 주류 도매상을 장악하고 있어 다른 소주 회사들이 쉽게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하지만 롯데는 여타 기업과 다른 강력한 경쟁자다. 백화점,대형 마트, 편의점, 슈퍼마켓 등 촘촘한 유통망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스키 시장에서 ‘스카치블루’를 비롯해 와인, 전통주 ‘천인지오’ 등 다양한 주종의 유통 사업을 벌이고 있다. 스카치블루는 국내 위스키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8%로 업계 3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또 롯데칠성이 지분 85%를 가진 롯데아사히주류의 아사히맥주도 국내 수입 맥주 시장에서 밀러, 하이네켄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인 셈이다.여기에 매각설이 나도는 OB맥주까지 인수하게 될 경우 롯데칠성은 소주 맥주 양주 전통주 와인 등 모든 주종을 갖춘 종합 주류 회사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국내 최대 종합 주류 회사인 하이트-진로 그룹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소주의 경우 지금 당장은 진로를 따라잡기는 어렵겠지만 롯데의 브랜드 파워와 유통망을 활용하면 앞으로 적지 않은 위협이 될 전망이다.이와 관련, 업계 관계자는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롯데가 자금 여력이 충분해 진로와 경쟁할 만한 힘을 갖췄다”고 말했다. 박종록 한화증권 애널리스트도 “롯데칠성 기존 사업부와 일정 부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진로와 롯데의 최대 격전지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시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국 소주 시장의 절반에 가까운 47%를 차지하는 수도권에서 진로의 점유율은 무려 81%에 달하며 두산은 18%에 그치고 있다.롯데가 소주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는 거대 수도권 시장을 현재 구도로 놓아둘 리 만무하다는 게 업계의 공통적 시각이다.현재 월 115만 상자의 ‘처음처럼’을 생산하는 두산주류 강릉공장을 풀가동할 경우 월 200만 상자까지 생산이 가능해 롯데는 이론상 수도권 점유율을 현재 18%에서 35%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 경우 전국 점유율은 11%에서 20%까지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 성립된다.주류 업계 관계자는 “롯데가 작심하고 소주 시장에 뛰어든 이상 최대 시장인 수도권을 잠식하기 위해 롯데칠성은 물론 그룹 차원의 역량을 총동원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대해 진로 관계자는 “2년 전부터 롯데가 소주 시장에 진출할 경우에 대비해 여러 가지 대응책을 마련해 왔다”며 “2010년부터는 진로와 하이트맥주의 영업·물류망을 공동 활용할 수 있게 돼 우리의 영업 마케팅 능력이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다.롯데의 소주 시장 진출로 지방 소주 업체들에도 ‘비상’이 걸렸다.특히 롯데의 연고지인 부산·경남지역 소주 업체인 대선주조와 무학 등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롯데가 프로야구단 롯데자이언츠 등을 등에 업고 지방 소주 시장에서 바람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부산 지역 종합 주류 도매 업체 관계자는 “지역 업체의 아성이 견고해 ‘처음처럼’의 시장점유율은 거의 미미했지만 부산이 거점인 롯데가 판촉을 강화하면 상황이 달라질 여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대선주조 관계자는 “롯데의 두산주류 인수가 미치는 파장이 상당히 클 것 같다”며 “지금까지 나름대로 시장을 잘 지켜온 만큼 롯데의 움직임을 봐 가며 대응 전략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이번 인수전은 신동빈 롯데 부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한 것으로 전해졌다.신 부회장은 지난 2005년 진로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을 때 하이트에 밀린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 하이트맥주 박문덕 회장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3조4000억 원을 인수 가격으로 써 내면서 2조 원대를 제시한 롯데를 제치고 진로 인수에 성공했다. 두 사람의 자존심 경쟁이 재현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이제 업계의 관심은 롯데의 OB맥주 인수 여부다. 업계에 따르면 롯데는 2008년 가을부터 OB맥주의 최대 주주인 벨기에 인베브사가 OB맥주를 매각할 것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오자 인수 타당성 검토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사실 자금력이 앞서는 롯데 입장에서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경쟁자들을 이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으로 분석된다.만약 롯데가 OB맥주까지 인수하면 하이트-진로그룹에 이어 명실상부한 ‘공룡 주류 업체’가 탄생하게 된다. 현재 맥주 시장은 하이트가 58%, OB가 41%를 차지하고 있다. 주류 업계 관계자는 “하이트-진로가 소주·맥주에서는 앞서지만 위스키 부문에서는 롯데가 앞서고 있어 이 세 주종의 판매가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내느냐에 따라 향후 주류 업계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OB맥주 인수와 관련해 롯데 측에서는 아직까지 이렇다 할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롯데 쪽에서 아무리 ‘사실 무근’, ‘관심 없다’란 태도를 표명해도 인수·합병(M&A) 얘기가 나올 때마다 롯데는 유력 후보 ‘1순위’로 꼽힌다. 롯데만큼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갖춘 기업이 드문 데다 그룹이 보유한 다양한 유통망과 부동산, 연관 사업 등으로 확실한 M&A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롯데쇼핑은 부채비율이 40%대 초반으로 신세계, 현대백화점 등 유통 3강 중 가장 낮은 반면 현금성 자산은 4조 원대로 가장 많다. 또 9~10월 롯데쇼핑, 호남석유화학, 롯데호텔 등 우량 계열사를 통해 약 1조 원의 외화 자금을 조달했다. 이에 대해 롯데는 “위기 상황에 대비한 운영자금 확보 차원”이라고 밝혔지만 업계에서는 M&A 자금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실제로 최근 1년 사이 롯데그룹의 M&A 행진이 잇따르고 있다. 롯데그룹이 미래 성장 축으로 삼고 있는 금융 분야에서 2007년 말 대한화재(현 롯데손해보험)를 인수한 데 이어 국내 최대 투자 자문사인 코스모투자자문을 6개월여의 가격 협상 끝에 최근 조건부로 인수했다. 유통 부문에서는 2007년 중국 마크로에 이어 2008년 10월 인도네시아 마크로를 인수했다. 식품 부문에서는 지난 8월 롯데제과가 네덜란드계 초콜릿 회사인 길리안을 사들였다. 이어 당초 ‘관심없다’던 두산주류BG의 우선인수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하지만 주목을 끌었던 조단위 대형 M&A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지난 2005년 진로를 하이트에 빼앗긴 데 이어 2008년 유통가 최대 M&A 건인 홈에버를 홈플러스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에 대해 롯데 관계자는 “아무리 좋은 기업이라도 적정 가격보다 비싸거나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무리하지 않는 그룹의 기본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한편 1952년 동양맥주(OB맥주의 전신)로 주류 사업을 시작한 뒤 1994년 경월소주를 인수해 소주 사업으로 영토를 확장했던 두산은 1998년 OB맥주를 매각한 데 이어 ‘처음처럼’까지 팔게 됨에 따라 이제는 주류 업계의 ‘전설’로만 남게 됐다.김재창 기자 changs@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