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국 이끄는 신흥 기업가들

중국은 개혁 개방 30년 동안 연평균 9.8%의 고성장을 구가했다. 그 뒤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인들이 있다.오토바이로 시작해 자동차 업체를 일군 중국 최대 오토바이 제조업체 리판의 인밍산(70) 회장은 “나는 영원한 18세”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무모할 만큼 끊임없이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 영어 강사와 출판사 편집 담당을 하다 친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토바이 제조업체를 창업한 게 54세이던 지난 1992년.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 개방에 힘을 실어주는 걸 보고 시장경제가 꽃을 피울 것을 간파한 것이다.그는 20만 위안(4000만 원)으로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기업 인수 등을 통해 17억 위안(3400억 원)의 자산을 가진 기업을 키워냈다. 그래도 그는 늘 부족하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택한 길이 ‘혼다 성장 전략 따라하기’다. 오토바이로 출발해 자동차 제조업체로 우뚝 선 혼다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65세이던 지난 2003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든 게 그런 이유에서다.기술 중시도 혼다를 닮았다. 인 회장은 그러나 중국 자동차 업계는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1의 길은 외국 회사와의 합작이었지만 선진 기술을 이전받는 데 실패했고 제2의 길은 지리자동차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 기술 개발을 고집하는데, 이보다는 네트워크로 기술력을 높이는 제3의 길이 낫다는 것이다.리판은 상하이통지대 등 중국 내 대학은 물론 영국의 D&P와 미국의 MSC 등 관련 업체들과 연계해 자동차 제조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2003년 1월 정치자문기구인 충칭시 정협 부주석에 올라 민영 기업의 대변자 역할도 해오고 있다.류융싱(60) 둥팡시왕그룹 회장은 2008년 중국 최고 부호(포브스 기준) 자리를 재탈환한 인물이다. 포브스는 2001년과 2002년 연거푸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선정했고 CCTV 역시 ‘2001년 10대 경제인물’로 그를 꼽았다. 류 회장은 포브스가 발표한 2008년 중국 부호 랭킹에서 204억 위안(약 4조800억 원)으로 1년 동안 23억 위안이 늘어나 최고 부호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동생인 류융하오(57) 신시왕그룹 회장도 4위에 올랐다.류융싱 회장은 3명의 형제와 함께 1982년 1000위안(20만 원)으로 쓰촨성 남서부에서 메추라기 양식 사업을 시작해 사료계의 왕으로 우뚝 섰다. 류 회장과 형제들은 과학을 접목한 영농으로 중국 농촌이 가야 할 길을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농촌 벤처의 원조인 셈이다. 그의 농장은 중국 지도부의 단골 견학 코스가 될 만큼 급성장했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톈안먼 사태가 일어난 1989년과 이듬해인 1990년에 지도부의 발길이 끊겼다. 자본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며서 위기감마저 느꼈다.류 회장은 회사를 정부에 넘기고 경영만 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 이름인 시왕(希望)처럼 류 회장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게다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류 회장은 반전을 시도한다.1992년과 1993년 2년간 국유기업 20여 개사를 인수·합병하면서 덩치를 키워 나갔다. 해외 진출 1호 민영 기업, 은행(민성은행)을 설립한 첫 민영 기업 등 늘 앞선 자리에는 늘 류 회장이 서 있었다. 류 회장 형제들은 최근 중국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농촌 육성에 대대적으로 나서는 흐름을 간파,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류융하오 회장은 “정부의 친농촌 정책을 활용해 돼지 닭 우유 생산을 크게 늘려 5년 내 연간 매출을 지금의 2배가 넘는 1000억 위안(20조 원)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말한다. 중국 정부가 본격 육성하기로 한 농촌 금융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다.류촨즈(64) 레노버홀딩스 회장은 중국 정부가 지향하는 글로벌 브랜드 차이나를 선도해 온 기업인이다. 중국 최대 컴퓨터 업체 롄샹(영문명 lenovo)의 지주회사인 레노버홀딩스를 이끄는 그는 개혁 개방의 물결을 타고 글로벌 기업을 일군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예전 영문 회사명 레전드(legend: 전설)는 그에게 딱 맞는 말이다.중국 정보기술(IT) 역사의 ‘전설(legend)’로 통하는 그는 1968년 시안군사전신공정학원을 졸업한 뒤 청두의 연구소에 배치됐지만 수개월 뒤 문화혁명에 휩쓸려 허난성의 농장에서 일하게 된다.하지만 덩샤오핑이 개혁 개방을 내건 이듬해인 1979년 중국과학원 컴퓨터기술연구소로 발령받으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군사 예산을 삭감한 중국은 젊은 과학자들에게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권했고 그는 연구소 경비초소로 쓰였던 23㎡(7평)짜리 벽돌 건물에서 10명의 동료와 함께 창업했다.수입 PC는 물론 전자시계와 운동화 등을 닥치는 대로 사다 팔았지만 TV를 구매하려다 사기꾼에게 속아 창업자금의 3분의 2를 날리고 말았다. 아버지 양복을 빌려 입고 IBM PC 수입 대리상 회의에서 참석했던 그가 20여 년 뒤인 2005년 IBM PC사업을 인수한 기업인으로 우뚝 서기까지는 곡절이 적지 않았다.1990년 독자 브랜드 PC를 내놓은 그는 버튼 하나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PC를 만들어 컴퓨터 조작을 잘 못하는 중국인들을 파고드는 등 중국 특색의 시장에서 점유율을 30% 가까이 끌어올리는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그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외국 회사들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점유율이 하락하게 된 것. 게다가 부동산 휴대전화 등으로 2000년 이후 본격화한 사업 다각화가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는 PC에 다시 집중하기로 하고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2005년 무려 17억5000만 달러(2조2869억 원)를 들여 IBM PC사업을 인수하면서 그가 얻은 건 세계 10위에서 3위 PC 업체로 커진 덩치뿐만이 아니다. “IBM은 토끼고, 레노버는 그 토끼 등에 탄 거북이죠.” 류 회장은 IBM을 통해 기술력, 브랜드, 국제화된 역량 있는 팀, 국제적인 배급망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뉴욕으로 본사를 이전하고 최고경영자(CEO)에 IBM맨을 앉힌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류 회장은 이제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레노버홀딩스 산하의 훙이투자와 벤처캐피털인 롄샹투자를 2010년까지 중국의 3대 투자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닷컴의 창업자 마윈(44) 회장은 ‘중국의 이베이’를 만든 기업인으로 불린다. 2005년 미국 인터넷 포털 사이트인 야후로부터 1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50만 위안(1억 원)으로 회사를 설립해 6년여 만에 기업 가치를 40억 달러(5조2272억 원)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었다.키 160cm의 ET(외계인)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199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전자상거래 포럼을 통해 창업을 결심하게 된다. 포럼 발표자의 85%가 미국인이고, 발표 내용도 대부분 이베이 아마존 같은 외국의 상거래 사이트라는 데 착안한 그는 중국 시장에 적합한 전자상거래 사이트를 만들기로 하고 알리바바를 창업해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 중 한 명으로 우뚝 섰다.마 회장은 애플의 창업자 스티븐 잡스가 스탠퍼드 졸업생들에게 주문한 ‘헝그리 정신을 가져라(stay hungry)’에 딱 맞는 기업인이다. 최근 타오바오닷컴 설립 5주년 기념식에 참석, “타오바오닷컴을 10년 내 미국의 월마트보다 더 큰 세계 최대 유통 업체로 키우겠다”고 공언한 게 대표적이다. 타오바오닷컴에 향후 5년간 20억 위안(4000억 원)을 추가 투자해 이베이와 아마존을 추월하고 10년 내 월마트를 넘어서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그러나 일각에서는 마 회장의 비전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2007년 월마트 매출은 3조5000억 위안(700조 원)으로 타오바오닷컴의 433억 위안(8조6600억 원)은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마 회장은 그러나 “중국의 인터넷 인구가 5억∼6억 명에 이르게 될 수년 뒤엔 매일 1억∼2억 명이 타오바오닷컴에서 물건을 사도록 하겠다”며 “세계 그 어떤 쇼핑센터도 이 정도 규모의 거래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