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일군 전설의 기업가들

1948년 잘나가던 대구의 삼성상회를 청산한 이병철은 서울로 진출했다. 그가 세운 ‘삼성물산공사’는 철판에서 재봉틀, 실 등에 이르기까지 수백 품목을 수입했다. 나라에 부족하고 꼭 필요한 물자만 찾아 공급한다는 이병철의 전략은 맞아떨어져 삼성물산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회사는 1년 만에 무역업 랭킹 7위라는 기록을 달성했고 다음 해에는 최선두가 됐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6·25전쟁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전쟁 발발 불과 3일 만에 서울은 함락됐고 미처 피란 가지 못한 이병철과 가족, 회사 직원들은 공포의 나날을 보냈다. 재산은 강탈당했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지자 이병철은 이런저런 걱정에 마침내 병이 났다.1946년 광복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정주영은 서울시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란 간판을 달고 자동차 정비업을 시작했다. 창업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종업원이 100명이 될 정도로 번창했다. 관청에 수리비를 받으러 간 정주영은 토건업자가 자신보다 몇 십 배나 큰 금액을 받아가는 것을 보고 토건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1947년 5월 25일 현대토건을 시작한 뒤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가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가 탄생했다. 그러나 설립한 지 6개월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정부와 군대를 철석같이 믿었던 정주영은 결국 식구들을 집에다 두고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1949년 여름, 선경직물 생산부장직을 사퇴한 최종건은 원사 도매업에 뛰어들어 상당한 이익을 거뒀다. 1950년 6월 최종건은 사업상의 결정적인 기회를 포착하고 선경직물 퇴직 후 모은 자금을 총동원해 원사를 확보했다. 그는 손수 인견사 11고리를 확보하고 서울시 창신동에 있는 창고에 원사를 보관했다. 그날이 6월 24일이었다. 그러나 최종건의 도약 기회는 6·25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았다.국내 기업가 1세대들의 기업가 정신을 되돌아보면 공통적인 점을 찾을 수 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기업정비령’을 발표해 한국 기업은 일본 기업에 합병돼야 했다. 광복 후 재기에 나선 이들 기업가들은 다시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는 듯 했으나 6·25전쟁으로 그간 쌓아올린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후 4·19, 5·16 등 정치적인 격변과 국제적 오일쇼크 등 기업 환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현 세대가 겪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와 미국발 금융 위기 못지않은 어려움을 그들은 이겨냈던 것이다. 전쟁을 겪은 그들은 제로(0)에서 시작했지만 그들의 기업가 정신은 멈추지 않았다.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피란처였던 대구에서 그의 양조장 운영자들이 모은 3억 원으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재창업할 수 있었다. 전시 특수 효과로 자본금 3억 원은 1년 사이 17억 원으로 불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또한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미8군의 토건업을 수주해 하루 3시간씩 자면서 한 달 만에 미군 10만 명의 숙소를 완성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최종건 회장은 전쟁 이후 종업원으로 일했던 선경직물을 인수함으로써 지금의 SK그룹의 기반을 닦았다.1세대 기업인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갔던 선구자였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기업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족적을 남긴 정주영 회장의 ‘이봐 해봤어?’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주변 사람들이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포기하려고 할 때 정 회장이 호통 치며 했던 말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그의 신념은 국내 최초의 조선소인 미포만 조선소 설립 일화에서 잘 나타난다.1960년대 중반,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설립을 위해 유럽으로 날아갔다. 영국은행을 움직이기 위해 기술 계약을 체결한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에게 추천서를 부탁한 자리. 정 회장이 500원권 지폐를 꺼내 거북선을 만든 저력을 가진 민족이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이 자리에서 롱바톰 회장이 “당신네 나라의 대한조선공사에 조회해 본 결과 ‘불가능’이란 회신을 받았다”고 얘기하자 정 회장은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 만약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가 있었다면 그들이 나보다 먼저 와서 돈을 빌리려 했을 것이다.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지 못한 것이고,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가능·불가능을 물었으니 불가능이란 답이 온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가능하다”고 대답했다.추천서를 받아 영국 바클레이 은행과 차관 도입 협의가 시작됐지만 배를 살 사람을 찾지 못했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 미포만 백사장 사진과 지도, 빌린 유조선 도면만 달랑 들고 선주를 구하러 다닌 끝에 배 두 척의 주문을 받아냈다. 결국 울산 조선소는 1972년 3월 기공식 후 1974년 6월 1차 준공식을 하며 최단 시일 내 조선소 건설과 동시에 유조선 두 척을 건조해 세계 조선사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무역업의 활황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을 때 이병철 회장은 생산 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경기 좋은 무역업에서 생소한 생산업으로 방향을 바꾸려고 하자 회사 내에서 반대도 많았지만 결국 밀어붙인 끝에 1953년 제당 공장을 세웠다. ‘제일제당’이 성공하자 이 회장은 다시 큰 뜻을 세웠다. 이번에는 모직물을 생산하기로 했다. 모직물은 공정이 단순한 제당사업보다 훨씬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결국 1955년 ‘제일모직’은 6개월 만에 국내 기술진에 의해 공장이 설립돼 생산에 들어갔다.그의 사업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농업 부흥을 위해 10년 동안 구상했던 비료 사업이 마침내 1967년 ‘한국비료’를 통해 생산을 시작했지만 그해 직원들이 몰래 사카린을 밀수한 것이 들통 나 결국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고 ‘삼성전자’를 설립해 전자제품 생산을 시작했고, 이어 신세계 백화점, 삼성조선, 삼성중공업 등을 일으켜 성공시켰다. 그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 때는 기존 사업이 활황기에 있을 때로, 경영진 대부분은 리스크가 큰 신사업에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이 회장은 미리 미래를 대비하는 선구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솔직히 말해 국내에서의 작은 성공에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국내에서 제일이 된다든지, 국내 경쟁에서 이긴다든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본을 축적해 차례차례 새로운 기업을 개척함으로써 선진 외국과 당당히 맞서 이긴다. 그것이 내가 나아갈 길이다.’ 이렇게 다짐했다.” 이 회장이 남긴 이 말에서 그의 도전 정신을 엿볼 수 있다.LG그룹 구인회 회장의 도전 정신은 국내 최초의 라디오 개발 과정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화장품과 플라스틱, 세제 등 석유화학 제품으로 성장하고 있던 당시 ‘락희화학’으로 승승장구하던 1957년 구 회장은 어느 날 라디오를 보고는 부하 직원에게 “그거 우리가 만들 수 없겠나?”라고 물었다. “우리 기술 수준으로 어떻게…”라고 대답하던 직원에게 구 회장은 “기술이 없으면 외국에 가서 배워 오면 될 것 아닌가. 그래도 안 되면 외국 기술자들을 초빙해 오면 안 되겠나”라며 이를 밀어붙였다. 6·25전쟁 중에도 화장품 용기 제작을 위한 플라스틱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구 회장이었다.우여곡절 끝에 1959년 ‘금성사’에서 국산 라디오 생산이 시작됐고 뒤이어 금성사는 1965년 국내 최초의 냉장고를, 1966년엔 국내 최초의 TV를, 1967년엔 국내 최초의 에어컨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당시 부잣집에서나 겨우 구경할 수 있었던 TV를 국내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금성사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전자산업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국내 산업의 기틀을 마련한 이들 1세대들이 오늘날 말해 주는 바는 명확하다. 시련에 굴복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물론 개발시대에 정치적 집단과의 이해관계가 맞았던 측면도 있었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기업가 정신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존 사업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본 이들의 혜안은 토목·건설업 위주의 개발 사업에 의존하려는 지금의 과거 지향적 분위기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