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연중 특별기획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은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내는 모험심과 도전 정신을 의미한다. 이때 기업가는 ‘기업가(企業家)’, 즉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리스크 테이킹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앙트레프레누어(Entrepreneur), 즉 ‘기업가(起業家)’를 가리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관리형 경영자가 아니라 창업가, 혁신가를 뜻한다.이러한 기업가 정신이 글로벌 경제 위기와 맞물려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전 세계가 기업가 정신의 부활에서 위기 극복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인은 새 행정부 인선을 발표하며 “근면함과 기업가 정신이 보상받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는 그동안 묵묵히 일한 국민과 기업인을 소외시킨 기존 경제·금융 시스템이 위기를 불렀다는 뼈아픈 자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건전한 기업가 정신의 재건에서 새로운 재도약의 희망을 찾고 있는 셈이다.미국 카우프만재단의 최근 조사 결과도 흥미롭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기업가 정신이 현재의 금융 위기를 해결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0% 이상이 미국 경제의 토대는 기업가들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답했으며, 80%가 정부가 자원을 적극 활용해 기업가 정신을 활발히 북돋우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응답했다. 또한 현재의 위기 상황에서 기업가적인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절반에 달했다. 위기에서 새로운 기업가 정신의 기회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뿐만이 아니다. 유럽과 일본도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는데 아낌없이 자원을 쏟아 붓고 있다. 이들은 기업가 정신을 고용 창출과 혁신의 핵심 원천으로 보고 있다.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때 한국은 기업가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하는 나라로 꼽히기도 했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1996년 쓴 ‘넥스트 소사이어티’에서 “기업가 정신을 실천하는데 있어 1등은 단연 한국”이라고 말했다. 6·25전쟁 직후만 해도 폐허에 불과하던 한국이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 수많은 분야에서 세계 선두로 올라서는 기적을 연출했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그는 “영국이 250년, 미국 독일 프랑스가 80~100년 만에 이뤄낸 것을 한국은 단 40년 만에 해냈다”고 격찬했다.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은 바로 불굴의 기업가 정신이었다.지난 2000년대 초반의 놀라웠던 벤처 붐도 주목할 만하다. GEM(Global Entrepren eurship Monitor)의 2000년 보고서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GEM은 미국 뱁슨대와 영국 런던경영대학이 1999년부터 수행하는 기업가 정신 국제 공동 연구 프로그램이다. 2000년 국가별 기업가 정신 수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인 총창업활동지수에서 한국은 건국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기업가 정신의 나라’ 미국을 앞지르며 세계 2위를 차지했다.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극적인 추락이다. 오늘날 한국이 한때 기업가 정신에서 1~2위를 다투던 나라였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과거 한국호를 힘차게 이끌던 빛나던 기업가 정신은 빠르게 퇴색했다. 도전과 개척정신은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안정 지향 최우선으로 ‘철밥통’을 찾아 헤맨다. 투자 의욕과 창업 열기도 식고 있다. 해외 언론은 ‘한국의 때 이른 중년의 위기’를 걱정한다.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하는 ‘한국의 기업가 정신 지표’는 이런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 지표는 1977년 72.3으로 정점을 기록한 이후 1980년대, 1990년대 들어 하락하다가 2001년 이후 4~7의 저조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전성기에 견줘 10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기업가 정신 지표는 사업체 수 증가율과 설비 투자액 증가율, 민간 연구·개발비 증가율을 단순 평균해 산출한다. 기업가 정신 지표를 구성 요소별로 분석해 보면 문제점이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1970년대 평균 38.2%이던 설비 투자액 증가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해 2000년대에는 오히려 마이너스(-2.6%)를 기록한다. 민간 연구·개발비 증가율도 1990년대부터 1970~8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한다. 다만 창업과 분사 등으로 사업체 수 증가율이 꾸준히 상승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바꿀 정도는 아니다.과연 기업가 정신은 이대로 잊혀져도 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기업가 정신의 활성화가 새로운 고용 창출의 거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 경제는 이미 ‘고용 없는 성장’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맞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산업의 취업 유발계수는 1995년 24.4에서 2000년 18.1, 2005년 14.7로 10년 새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취업 유발계수는 10억 원을 투자할 때 만들어지는 일자리 수로, 이 계수가 떨어지면 경제성장률을 높이더라도 그만큼 일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최근 불어 닥친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데도 기업가 정신의 복원은 필수적이다. 단순히 위기에 떠밀리지 않고 위기를 또 다른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전 정신으로 충만한 기업가 정신이 뒷받침돼야 한다. 위기는 완고하게만 느껴지던 기존 질서를 뒤흔들어 새로운 싹이 뿌리내릴 수 있는 균열을 만들어 준다.물론 기업가 정신을 되살리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한 국제 콘퍼런스에서 마커스 푸델코 고려대 교환교수는 “한국에서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는 것은 약간의 조정이나 변화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비즈니스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사회 전체를 포함하는 큰 도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번이 기업가 정신의 DNA를 되살려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