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 24시
어느 조직이든 연말이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한 해를 정리하고 신년의 각오를 다지는 자리를 갖게 마련이다. 우리가 망년회 또는 송년회라고 부르는 모임이 바로 그것이다. 때때로 폭탄주가 몇 순배씩 돌고 2차에 3차까지 술독에 빠져 흥청망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공무원들도 예외는 아니다. 2007년까지는 통상 각 부처 장관이 국장급 이상 고위 공무원들을 모두 모아서 송년 만찬을 여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2008년에는 적어도 경제 부처가 몰려 있는 과천에서만큼은 그런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2009년 초 개각설에다 1급 물갈이까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썰렁한데다가 경제 위기로 새해 업무 보고까지 2008년 말에 앞당겨 치르느라 송년회랍시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할 여유조차 없어진 것이다.지식경제부는 국장급 이상이 모이는 간부 송년회를 2008년 12월 17일로 잡았다가 결국 취소했다. 대통령 업무 보고가 12월 26일로 잡히면서 갑자기 바빠졌기 때문이다. 지경부의 한 간부 공무원은 “장관이 업무 보고 끝나면 ‘언제 모여라’ 이렇게 해줘야 뭉칠 텐데 요즘 같아서는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고 전했다.이윤호 지경부 장관은 간부 송년 만찬 대신 2008년 12월 23일 출입 기자들과 송년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 있었던 한 기자는 이 장관을 두고 “거의 마음을 비운 사람 같았다”고 전했다. 일부에서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지경부의 분위기가 어떨지 상상이 갔다. 전부 앞날을 걱정하느라 한 해를 돌아볼 여유가 없을 법도 했다.기획재정부 역시 아직 간부 송년회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재정부 대변인은 “공식적인 행사는 없고 출입기자단 만찬에 간부들이 참석하는 것으로 송년회를 갈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2월 26일 열린 재정부 간부와 출입기자단의 송년 만찬은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정책 세미나’를 겸해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 또 다른 간부는 “국장은 빼고 1급 이상이 몇 명 모여 간단하게 저녁식사는 했다”고 전했다.사실 재정부는 지경부와는 분위기가 좀 다른 게 사실이다. 강만수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여전히 돈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관이 직접 “1급 물갈이를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까지 못 박았기 때문에 조직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술렁거리는 분위기는 아직 감지되지 않는다. 대신 재정부는 장차관 1급 국장 과장 사무관 할 것 없이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문제였다. 송년회 분위기를 내기도 어려웠고 차분하게 어떻게 연말을 보낼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이는 새해 업무 보고가 연말로 당겨진 때문이다. 경제 운용 방향을 발표한 지 1주일 만에 또다시 부처 업무 보고를 준비하느라 재정부 경제정책국 정책조정국 등은 거의 초죽음이 되다시피 했다. 지난 12월 12일 세법 개정안(13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채 2주도 지나지 않은 12월 25일까지 시행령 작업을 끝마친 세제실도 지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정부의 한 간부는 “국회에서 고생고생해서 법안을 통과시키고 나니까 2008년 내에 후속 조치를 마치라는 지시가 내려오더라”며 “이렇게 일이 몰아치는데 폭탄주를 돌린다고 기분이 좋겠느냐”고 투덜거렸다.설상가상으로 1급들이 이미 사표를 내둔 부처는 누가 먼저 나서서 ‘모이자’는 얘기를 꺼내기조차 힘든 분위기다. 농림수산식품부가 대표적이다. 사표를 받은 장관과 울며 겨자 먹기로 사표를 써낸 1급이 한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공공기관 청렴도 조사에서 중앙 행정기관 중 꼴찌를 차지한 공정거래위원회도 모여서 “건배”를 외칠만한 상황은 아니다. 더구나 이 조사 결과가 하필이면 대통령에게 업무 보고하는 날 발표돼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의 얼굴이 영 좋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공정위의 관심은 자연스레 송년회보다는 대책 마련에 쏠려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새로운 내부 윤리 강령을 마련하기 위한 의견 수렴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한 경제 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은 “1998년 외환위기 때도 간소하게나마 송년회를 치렀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차기현·한국경제 기자 khcha@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