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근아 너는 소중한 사람이란다!”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이 말을 떠올리면 가슴이 떨린다.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가장 위대한 유산이 이 한마디였기 때문이다.내 고향은 경남 진주의 대곡이라는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고향의 평화로운 풍경이 함께 떠오른다. 또 가난했던 살림살이에 고민하시던 부모님의 애틋한 마음도 겹쳐온다.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대우받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밥상이었지만 계란 프라이는 늘 내 밥그릇 위에 있었다. 어쩌다 동네잔치에서 얻어온 돼지고기 수육이 밥상 위에 올려지면 항상 제일 먼저 내 차지였다. 철없는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집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내가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이었고, 사랑을 넘어 나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가난한 농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짓이었다.철이 들어 진주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친척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가까운 시골 고등학교를 가지, 돈도 없는 집에서 무슨 도시 유학이냐고. 모두가 반대하는 일을 아버지는 묵묵히 밀어붙이셨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어도 기뻐만 할 수 없는 아버지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올 때 아버지는 싸구려 솜 점퍼를 새로 사주시고 거금 오만 원을 손에 쥐어주셨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주셨다. 그때 난 억만금을 쥔 것보다 더한 기쁨의 전율을 느꼈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뼛속 깊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가정 형편이 어려운 동네의 또래 친구들이 모두 도시에 돈 벌러 나가던 시절, 아버지는 내게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마음에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했던 나도 아버지 말씀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안다는 것이었다.안타깝게도,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혼자 돈을 벌어 공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늘 나타났다. 내가 일했던 회사의 사장님도 내 형편을 아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지낼 곳을 마련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도 생겨났다.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은혜를 입는 것은 아니었다. 노력해도 일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을 만나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날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내게는 도와주는 사람이 계속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말씀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날 소중하게 생각하신 덕분에 나 또한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고, 생활고 따윈 별것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가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다니던 회사가 부도났을 때, 나는 힘들어하기보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했고 2년 만에 합격했다. 그때 내 곁에는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지금의 아내가 있었다.사람이 살아가면서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좋다고 마냥 좋고 나쁘다고 마냥 나쁜 게 아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가난했지만, 그리고 쉽지 않았지만 내 인생은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다. 내가 목표했던 일을 이뤘고, 또 다음 목표를 향해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지금 소망은 내 아이들이 이런 아비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아직은 아버지처럼 내 자식들에게 가슴으로 다가가 “넌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해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니 잘 안 된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에게 평생의 선물을 받았듯, 그 소중한 마음을 유산 대신 물려줄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딸들아, 너희는 정말 소중한 사람이란다!”라고.공인회계사. 한국경제신문 창업자문위원단. 한국 CPM협회 세무고문위원. 한국소자본창업컨설팅협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프랜차이즈 기업의 세무 관련 교육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