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저주’에 떠는 M&A 시장

글로벌 인수·합병(M&A) 시장이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에 떨고 있다. 승자의 저주란 무리한 M&A가 오히려 경영 위기의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현상을 말한다.시장조사 기관인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올 4분기 중 파기된 M&A 계약 규모는 3220억 달러(435조 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성사된 M&A 규모 3620억 달러(489조 원)에 육박하는 액수다.세계 최대 철광석 업체인 호주 BHP 빌리턴은 최근 1년여를 끌어 오던 660억 달러 규모의 리오틴토 인수 계획을 전격 철회했다. BHP의 돈 아거스 회장은 최근 성명에서 “금융시장이 단기적으로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며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리오틴토 지분 인수 계획을 철회한다”고 밝혔다.기업 M&A 사상 최대 규모의 차입 인수(LBO)로 주목받았던 캐나다 최대 통신 업체 벨캐나다(BCE) 매각도 M&A의 마지막 관문인 ‘건전성 심사’에 막혀 사실상 좌초됐다. 당국이 BCE가 차입 인수로 300억 달러의 부채를 짊어진 채 민간 기업으로 새롭게 출범할 경우 생존 전망이 밝지 않다고 결론 지었기 때문이다.한국에서도 최근 동국제강이 쌍용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지 5개월 만에 인수를 사실상 포기함에 따라 하이닉스반도체 현대건설 등 ‘빅딜’을 앞두고 M&A 시장이 얼어붙고 있다.시장조사 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9월 1일까지 글로벌 M&A 거래 규모는 2조5000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3조4600억 달러)보다 27% 감소했다.특히 2006년과 2007년 바이아웃(LBO·피인수 회사의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 그 회사를 인수하는 금융 기법) 붐을 타고 은행 대출을 자금줄로 삼아 대형 매물을 인수한 사모 펀드들은 혹독한 승자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 바이아웃 사상 최대 빅딜 10개 중 무려 9개가 2006년 7월부터 2007년 6월까지 1년 새 이뤄졌다. 당시 미 최대 라디오 방송사인 클리어채널을 18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하고 올봄 최종 계약을 마무리한 베인캐피털은 올 들어 클리어채널 주가가 70% 이상 하락하면서 타격을 입었다. 이에 따라 올 들어 사모 펀드들의 M&A 규모는 지난해보다 무려 78%나 급감해 전 세계 M&A 시장에서 6%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기업 사냥에 나섰던 대형 사모 펀드들이 정작 인수한 업체의 경영 개선은 등한시하면서 회사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미국 시사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최근 사모 펀드에 인수된 후 경영이 급속도로 악화된 기업들을 소개했다. 지난 7월 파산보호를 신청하며 점포 정리에 들어간 미 소매체인 머빈스가 대표적이다.1949년 설립된 머빈스는 2004년 8월 120억 달러에 서버러스캐피털과 선캐피털, 러버트애들러 등 3개 사모 펀드에 인수된 후 4년간 부채 규모가 8억 달러에 달했고, 보유했던 부동산 자산도 거의 잃었다. 사모 펀드들이 투자금 회수를 위해 머빈스의 자산 매각과 부채 규모 확대에 공격적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2003년 1억6000만 달러였던 영업이익은 3년 만에 1억 달러로 줄었지만, 같은 기간 사모 펀드들은 배당금 명목으로 1억3700만 달러를 뜯어갔다.2006년 12월 아폴로매니지먼트와 텍사스퍼시픽그룹(TPG)이 265억 달러에 사들였던 라스베이거스의 대형 카지노 업체 하라스엔터테인먼트도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하라스는 지난 3분기 1억2970만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 전년 동기 대비 적자로 돌아섰다. 미 반도체 업체 프리스케일은 지난 2006년 9월 칼라일과 블랙스톤, TPG, 퍼미라 등 4개 사모 펀드가 공동으로 176억 달러를 들여 인수하면서 당시 정보기술(IT) 업계 최대 M&A 매물로 손꼽혔었다. 하지만 프리스케일은 올 3분기 순손실이 34억8100만 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적자 폭이 10배가량 커졌다.인수 기업들의 잇따른 부진은 사모 펀드들에도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사모 펀드의 지분 가치가 장외시장에서 큰 폭으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TPG는 장외시장에서 달러당 45센트에 지분이 거래되고 있고 블랙스톤은 사실상 제로 수준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유병연·한국경제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