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② - 마리아주(marriage: 결혼)

아기 타다시 ‘신의 물방울’일본 우익을 대표하는 이시하라 신타로는 ‘일본인의 자녀교육’에서 충격적인 주장을 편다. 자녀의 성공을 바란다면 ‘요절하는 아버지가 이상적’이라는 것이다.“이상적인 아버지란 어느 날 갑자기 바다에서 조난하여 죽는 어부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때 아들은 아버지에게 배워야 할 것을 아직 3분의 2 정도밖에는 배우지 못한 상태에 있다. 아들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아버지에게 배운 지식에다 자기가 익힌 기술을 보태어 간다.” 그는 “노련한 어부인 아버지가 그것을 자식에게 남김없이 가르치게 되면 아들은 그저 아버지의 인생을 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그의 언설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자녀 교육에서는 때로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상태가 오히려 아이들을 망칠 수도 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 만석꾼 정재규는 상속받은 재산을 노름으로 탕진하며 인생을 힘써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반면 ‘아버지의 부재’ 상태나 재산의 궁핍 상태는 오히려 자녀에게는 인생의 지혜를 배우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해 입신양명으로 이끌기도 한다.그런데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의외로 요절한 아버지를 둔 경우가 많다. 공자는 아버지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나 첩이었던 어머니와 살았다. 레오 톨스토이도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톨스토이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로 이사를 갔지만 이내 죽고 말았다. 영국을 대표하는 지성 버트런드 러셀도 두 살 때 어머니,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특히 러셀은 무신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의 삶에 큰 좌표가 됐다. 퇴계 이황도 생후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홀어머니 박 씨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칸자키 유카타와 아들 시즈쿠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시즈쿠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아버지로부터 교육받은 기억들을 되살리며 와인 전문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여행지를 따라다니고 음악과 그림 감상, 레스토랑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드나들었거든. 그런 아버지의 생각을 모를 리 없잖아.와인 마르샤네(Marsannay)는 만화 ‘신의 물방울’에 소개돼 국내 와인 마니아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마르샤네는 부르고뉴 와인 산지로 코드 드 뉘의 최북단 지역에 있는 마을로 ‘마을 단위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다.그런데 마르샤네는 양조가(도멘) 필립과 뱅상 레노스(Philippe et Vincent Lecheneaut) 형제의 노력으로 일군 와인이다. 마치 이시하라 신타로의 충격적인 예견처럼 아버지가 죽은 후에 와인의 명가 반열에 올랐다. 아버지 페르디난드 레스노가 운영할 때에는 25헥타르의 작은 밭을 가진 영세 도멘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1986년 타계하자 전혀 다른 성격의 두 형제는 늘 충돌했다. 형 필립은 보수적이고 사려 깊은데 반해 동생 뱅상은 말이 많고 명랑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형은 와인에서 포도를 중시했고 동생은 양조에 힘을 쓰자고 주장한 것. 한 병의 와인 속에 두 사람의 주장이 충돌해서는 마시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와인을 만들 수 없다.형제는 의논 끝에 서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형은 포도 생산을 전담하고 동생은 양조 책임자로 일을 분담하기로 했다. 의기투합한 형제는 감동을 낳는 한 병의 와인을 만든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서로의 역할에 충실했다. 와인 밭을 사들인 두 사람은 1991년 와인을 생산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 주니어조차 특급 포도밭 ‘클로 드 라 로쉬’에 100점 만점을 헌상했다. 형제는 아버지 사후에 마을 단위 와인인 마르샤네에서 그랑크뤼(Grand Cru) 클로 드 라 로쉬로 와인의 명가를 일군 것이다. 그랑크뤼는 부르고뉴 와인의 등급을 매길 때 최상급으로 테르와르(포도밭의 환경으로 나타나는 와인의 개성)가 최상인 상태를 가리키는 특급 와인이다. ‘천지인’은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천은 태양과 습도, 바람 등 기후, 지는 토질이다. 여기에 양조가의 열정이 뒷받침돼야 명품 와인이 탄생하는 것이다.일식에서는 느끼한 요리를 먹은 뒤에는 산뜻한 번차(番茶)가 나오는데 맛을 헹궈내기 위한 것으로 그것 자체를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게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 요리의 와인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프랑스 요리에 있어 음료수는 요리의 개성을 말끔하게 지우는 것이 아니다. 특히 와인과 요리는 오히려 서로 드높이기 위한 것.때때로 근사한 와인을 마시기 위해 요리를 거기에 맞추는 일도 있다. 그래서 프랑스 요리와 와인의 관계를 ‘마리아주(marriage: 결혼)’에 비유한다. 와인과 요리가 서로 드높이는 것은 서로를 돋보이게 해준다는 의미다. 여기서 마리아주에 비유하는 이유다. 즉, 결혼의 경우도 서로를 자극해 주는 부부관계가 이상적인 것이다. 맛있는 프랑스 요리가 근사한 와인 덕택에 더욱 돋보이게 느껴질 때도 있고 반대로 요리가 와인의 매력을 끌어내 주는 경우도 있어요. 그게 ‘마리아주’예요.프랑스 요리에서는 와인 한 병이 자칫 장사를 그르칠 수도 있다. ‘신의 물방울’에서 레스토랑 ‘파미유’의 오너 와타누키는 와인과 요리의 궁합이 맞지 않은 미스매칭이 발생해 레스토랑이 위기일발을 겪기도 했다. 시즈쿠가 아버지와 굴 요리를 먹던 장면을 회상하면서 이를 바로잡았다. 즉, 요리와 와인의 마리아주를 생각하면 와인은 반드시 특급 와인일 필요가 없다. 단, 값싼 와인이라도 테르와르가 맞으면 요리와 더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칸자키 유카타는 웨이터가 특별히 준비한 값비싼 샤블리 와인 대신에 값싼 와인을 고집했던 것이다. 프랑스 요리와 와인은 부부 같은 관계야. 코스 요리라면 일품마다 각각 와인을 맞춰서 내는 게 이상적인 마리아주인 셈이지.시노하라 미야비의 옛 애인 다카스기는 개장하는 명품 슈퍼마켓에 고급 브랜드의 와인만을 납품해 줄 것을 시즈쿠가 다니는 와인사업부에 요구한다. 어릴 때 여자 친구에게 시계를 선물했다가 명품이 아니라고 모욕당한 경험으로 명품만을 고집하게 된 것. 다카스기는 자신의 와인 리스트를 주며 이 리스트대로 수입해 납품해 줄 것을 요구한다. 시즈쿠가 와인은 브랜드 가방 같은 것과 다르고 등급이나 지명도로 와인을 고르는 사람은 정말로 와인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와인에서 초일류라고 할 수 있는 건 제1급 샤토인 마고, 라피트, 라투르, 오 브리옹, 무통의 5대 샤토와 르 팽, 페트뤼스, 슈발 블랑, 그리고 로마네 콩티를 거느린 세계 최고 고급 와인 메이커 DRC의 그랑 크뤼 외에는 없습니다.”시즈쿠는 값싼 와인 중에서도 명품보다 더 맛있는 와인이 있다고 주장하며 5대 샤토를 대체할 와인을 찾아 나선다. 특히 샤토 마고의 대항마를 찾아 나선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마고는 루이비통 가방 같은 존재로 간주하고 있는 것. 결국 다카스기는 시즈쿠가 준비한 값싼 와인들을 시음하고 뜻밖에도 충격적인 경험을 한다.“신기한 광경이었어요. 페가수스를 타고 추억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났어요. 이건 그냥 술이 아니었어요. 보다 심오하고 엄숙하고 풍부하고 그러면서 싱싱한…. 생물 같은 존재입니다.”그가 마신 와인은 샤토 샤스 스플린 70년. 보르도의 5급 와인보다 더 낮은 부르주아급이었다. 샤스 샤플린은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가 붙여준 이름으로 ‘슬픔이여 안녕’의 의미. 다카스기는 이를 계기로 명품병을 고치게 된다. 와인은 등급으로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술이 아니야. 천지인이 맞아떨어지면 급이 낮은 테르와르에서 근사한 와인이 나오기도 해. 난 네가 그걸 깨닫기 바랐어. 와인을 장식품처럼 브랜드로 고르는 건 잘못된 생각이야.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