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 경영으로 위기 맞서는 기업들

“이렇게 어려운 경영 환경은 삼성 입사 후 처음입니다.”삼성전자의 이기태 부회장이 지난 12월 10일 지식경제부와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열린 ‘2008 대·중·소기업 상생 협력 국제 콘퍼런스’에서 한 말이다.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통에 2009년 경영 계획을 확정하기조차 힘겹다는 설명이다.이 부회장의 고충은 비단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당수 기업들이 2009년 경영 계획을 잡지 못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400개 기업의 85%가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 때문에 2009년 경영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2009년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기업이 34%에 그쳤다. 2008년에는 54%가 확대한다고 응답했다.하지만 모든 기업이 주눅 든 채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번 경제 위기가 오히려 세계시장에 대한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삼겠다는 ‘역발상 전략’이 재계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경쟁 기업들이 주춤하는 사이 과감한 투자를 진행하면 승부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증권가에서도 이번 기회가 국내 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한 기회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휴대전화, 반도체, 디스플레이, 조선 등 한국의 기간산업 상당수가 이에 포함된다.삼성경제연구소도 경쟁력이 있는 기업들의 경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재무 유연성과 소프트 경쟁력이 양호한 기업이라면 인수·합병(M&A)과 선행 투자를 통해 불황기 이후 시장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POSCO 등 국내 대표 기업의 경우 글로벌 경쟁 기업에 비해서도 재무 유연성과 소프트 경쟁력이 뒤처지지 않아 공격 경영을 펼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연구소는 평가했다.실제로 국내 대표 기업들은 불황에 맞서 ‘공격 경영’을 선언하고 있다. 먼저 삼성전자는 휴대전화와 반도체 시장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위기 시에 경쟁력을 더욱 강화해 경쟁 기업과 격차를 좀 더 벌려 놓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의 주우식 부사장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4회 삼성테크포럼’에서 “이번 글로벌 위기를 통해 삼성만의 경쟁력을 강화해 경쟁사들과 격차를 더 확대시킬 것”이라며 “변화에 긴밀히 대처하면서 경기 회복 이후를 준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휴대전화의 경우 세계시장 점유율을 20%대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를 위해 선진국 시장엔 고가 제품으로, 신흥 시장엔 중저가 제품의 비중을 늘리고 최근 들어 부각되고 있는 스마트폰 시장엔 올해보다 2배 이상 많은 20여 개의 신규 모델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 3분기 말 현재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점유율은 17.1%였다.최근 몇 년 동안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반도체 사업에서도 공격 드라이브를 걸 방침이다. 주력 제품인 D램과 낸드플래시의 공정을 개선하고 원가 경쟁력을 강화해 경쟁사의 추격을 더욱 멀찌감치 따돌린다는 계획이다.LG전자는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통합 글로벌 광고 캠페인’을 공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그동안 현지법인 단위로 자체 제작되던 광고를 본사 차원에서 통일적으로 제작, 세계시장에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통합 글로벌 광고는 국내는 물론 이미 프랑스 호주 브라질 러시아 등 전 세계 10여 개국에서 실시되고 있다. 위기 상황일수록 공격적인 브랜드 투자가 중요하며 이를 계기로 글로벌 시장에서 LG전자의 브랜드 가치가 혁신적으로 향상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더모트 보든 LG전자 마케팅최고책임자(CMO)는 “최근 국제적인 경제 위기 상황에서 LG전자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광고 캠페인을 전개해 LG 브랜드가 근본적으로 재평가 받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특히 중국에서는 휴대전화 시장점유율을 획기적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이어서 주목된다. LG전자 중국 본부는 베이징에서 열린 ‘주요 대리상 대회’를 통해 마케팅 투자, 신제품 수, 유통망을 각각 2배씩 늘린다는 ‘트리플 더블’ 전략을 발표했다. TV 광고 등을 통한 마케팅 활동을 확대하고 현재 7000여 개 수준인 유통 대리점을 1만3000개로 늘리고 신규 제품은 올해 30개 수준에서 2009년에는 60개 이상까지 내놓을 예정이다.현대자동차는 ‘창조적 품질 경영’을 모토로 삼아 위기를 돌파하기로 했다. 이번 경제 위기에서 특히 불확실성이 도드라지고 있는 자동차 산업의 위기를 품질 향상으로 헤쳐 나가겠다는 설명이다. 품질 경영의 슬로건은 ‘GQ(Global Quality) 3·3·5·5 달성’이다. 제품 품질을 3년 안에 세계 3위권으로 올리고 브랜드 인지도와 품질은 5년 안에 세계 5위 안에 진입시키자는 것이다.현대차의 위기 극복을 위한 공격적인 자세는 ‘글로벌 R&D센터 회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몽구 회장은 이 자리에서 “어렵다고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줄인다면 미래 성장을 장담하기 어렵다”며 “현대차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소형차 개발을 한층 강화하는 한편 신흥시장을 보다 공격적으로 개척해야 한다”고 주문했다.실제로 현대차는 체코 노소비체 공장을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가동하는 등 신흥시장 공략의 고삐를 죄고 있다. 현대차는 노소비체 공장의 생산 능력을 2010년까지 연간 30만 대까지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POSCO는 2009년 사상 최대의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국내 투자 규모를 지난해의 2배 수준인 6조 원으로 늘린다는 것.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지난 12월 11일 ‘범 포스코 상생경영 선포 및 공정거래 협약식’에서 “전 세계 철강사들이 감산에 나설 정도로 경영 여건이 어렵다”며 “하지만 포스코는 투자를 대폭 늘려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일자리 창출과 중소기업 성장 기반 구축에도 기여하겠다”고 말했다.사상 최대 투자는 주로 신규 설비 구축에 투입될 예정이다. 신제강 공장과 광양의 제4고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원료 처리 시설도 확충할 계획이다. 제강 시설 건설은 이미 착공된 상태이며 2010년 완공될 예정이다. 연간 300톤의 쇳물을 처리할 수 있으며 비용도 연간 2000억 원가량 절감할 수 있다.유통 업계에선 신세계가 움직이고 있다. 신세계는 최근 남대문 본점 부근에 있는 쇼핑몰 ‘메사’를 인수했다. 회사 측은 쇼핑몰을 지금까지처럼 운영하고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선 과거 불황기에 적극적인 투자로 성장의 모멘텀을 확보했던 신세계가 이번에도 공격적인 투자로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 외에도 신세계는 투자 자금 1조 원이 들어간 부산 센텀시티를 오픈할 예정이다.SK케미칼도 신규 투자를 통한 미래 경쟁력 강화의 대열에 동참했다. 지난 11월 충청북도 청주시에 국내 최대 규모의 천연물 원료 의약품 생산 공장을 착공했다. 이 시설은 2010년부터 본격 가동할 예정이며 여기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통해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 시장에 대한 진출을 가속화한다는 게 회사의 방침이다.현대모비스는 하이브리드 자동차 부품 개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기로 했다. 2012년까지 1000억 원을 투자해 핵심 부품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현재 60명 수준인 하이브리드 관련 연구원을 200명 수준으로 늘려 나갈 방침이다.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