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집에는 늘 늦었고 일요일에도 여가 생활이며 사회 활동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으셨다. 집안일에도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우리가 살았던 어느 집 부엌에는 가본 적이 없으셨을 정도이니 아버지의 존재감은 거의 느껴보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 같다.그러한 아버지가 커다란 울타리였다는 것을 내가 직업을 가지고 전쟁터 같은 사회생활을 겪어 보니 뼈저리게 느껴진다. 5남매가 적절한 교육을 받고 사회의 일원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도록 공기처럼 공급하셨던 아버지의 역할을 이제야 절실하게 느끼고 많이 감사드리고 있다.기억의 단편을 되살려 보면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가볍게 뺨을 맞았던 것이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가볍게 스치듯이 뺨을 맞았는데 뚜렷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전까지 아버지는 절대 화를 내지 않는 분이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아버지의 연세는 만 80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들과도 유머가 통할 정도로 유머 감각이 탁월한 분이시다. 그렇게 재미있고 인자하던 아버지에게 혼났으니 열 살의 둘째 딸로서는 심히 서러웠던 모양이다.그 다음 아버지에 대한 뚜렷한 기억의 시작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접으시면서 우리 모두를 불러 모아 그 상황을 설명하시던 모습이다. 평생 갈 줄 알았던 안정된 생활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시던 아버지. 그 당시 아버지의 그 절박한 심정을 자식으로서 이제야 이해하는 것이 정말 송구할 따름이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산하 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고 회사에도 다니면서 집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고 공무원 연금을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 집에는 경제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그러나 직위의 크나큰 변화를 겪으면서 아버지도 많이 변해 가셨다. 자잘한 일상생활을 우리와 같이 해나가게 되면서 그간의 어색함을 점차 극복하고 그야말로 우리의 생활 한가운데로 들어오셨다. 그 후부터 내 모든 기억에 아버지가 있다. 언니 결혼식에 처음 신부를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연습하시던 아버지, 아침마다 손자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하시던 아버지, 차 안에서 귀신 이야기로 손자들을 즐겁게 해주시던 아버지, 개울가에서 복숭아를 씻어 주시던 아버지, 엄마와 두 딸과 처음 골프를 하면서 초보인 우리들을 위해 온 산으로 공을 찾으러 다니면서도 가족과 운동하는 것을 너무 즐거워하시던 아버지, 등산을 가서 운동보다는 가족들과 도시락 먹으며 소주 한잔 하는 것을 큰 낙으로 삼으시던 아버지 등등.함께했던 일도 기억이 많이 나지만, 늘 가슴에 새겨지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다. 내가 안정된 연구원 생활을 마다하고 어려운 창업의 길을 택했을 때, 사업의 고비마다 고민하고 어려워 할 때, 그리고 최근에 정치인의 길로 들어설 때 해주시던 아버지의 금과옥조 같은 조언을 고마움과 함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니면 해줄 수 없는 그런 비밀스러운 충고를 나도 내 자식들에게 앞으로 전달할 것이다.최근 아버지에게서 또 소중한 것을 배우고 있다. 4년 전, 아버지는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왔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체중이 줄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6개월 만에 10kg이 줄었다. 그때부터 서둘러 병원으로 모시고 가 우여곡절 끝에 신장암 진단을 받기까지 3개월이 걸렸고, 한쪽 신장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으셨다. 최근에는 신장암이 폐로 전이된 것이 발견돼 폐의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기까지 했다. 그 시간 동안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정신력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낙천적이지만 초연한 모습. 그 어느 현자라도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아버지 같은 의연함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아버지는 공기처럼, 잔잔한 시냇물처럼 내 인생을 감싸고 보듬어 현재의 나를 만들어 주신 것 같다. 이제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아버지처럼 기억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서울대 미생물학과. 미국 뉴욕주립대(박사) 졸업.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의과학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을 거쳐 리젠바이오텍을 창업했다. 현재 18대 국회의원(한나라당)에 당선돼 지식경제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