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석학 인터뷰 - 테라시마 지쓰로 일본종합연구소 회장

테라시마 지쓰로(寺島實郞·61) 일본종합연구소 회장 겸 미쓰이물산 전략연구소 소장은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 논객으로 유명하다. 1947년생인 그는 단카이(團塊)로 불리는 일본의 전형적인 베이비 붐 세대다.와세다대를 졸업하고 1970년대 엘리트들이 몰렸던 종합상사 미쓰이물산에 입사했다. 지금까지 35년간 미쓰이물산에 몸담고 있지만 물건을 사고파는 실무 경험은 거의 없다. 주로 조사와 연구, 기획 업무만 해 왔다. 뉴욕 본점 정보담당 과장과 워싱턴 사무소장을 지내며 1990년대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 근무를 마치고 1998년 ‘국가 논리와 기업 논리’란 책을 펴내 주목받았다.글로벌 안목을 갖춘 테라시마 소장은 방송과 신문 등을 통해 경제 현안을 명쾌하게 풀어주고 앞으로 다가올 경제 이슈에 대해 정확히 예측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됐을 당시 모든 이들이 자유주의 시장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 중심의 금융 시스템과 미국 달러 중심의 시장경제가 흔들리면서 미국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마음은 매우 안쓰럽고 불신의 벽이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앞으로 ‘다국적 글로벌 경영 체제’가 도래할 것입니다. 미국 중심에서 벗어나 여러 국가가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금융 질서 체제를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무국(無國)적’, 즉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도 참석해 현 경제 위기에 대해 의논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돼야 합니다.현재 동원되고 있는 미국의 대응책은 신용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추가적인 유동성을 확보하는 정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동성 투입, 재정 투입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과잉 유동성을 유발하려 하고 있습니다. 유동성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는 건전한 산업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면 새로운 금융 버블을 초래할 것입니다.신자유주의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흔들리자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의 금융 시스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러시아 중국 등 정부가 강한 시장 통제력을 갖고 경제 정책을 만들어 운영하는 나라를 언뜻 보면 잘 굴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패배했다고 단언하긴 어렵습니다. 중국을 가리켜 ‘사회주의적 자본주의 시장국가’라고 부르는 데 이런 생소한 표현이 어디 있습니까.신자유주의가 추구해 온 규제 완화, 철저한 시장주의, 개혁 개방 등의 이념은 앞으로도 중요한 의미로 남을 것입니다. 다만 지나친 머니게임을 불러왔던 시장구조를 공적으로 제어할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각국 정부와 기업, 금융회사들이 갖춰야 할 것은 균형 감각입니다. 국가 개입이나 전체주의 통합으로 기우는 것도 위험합니다. 한편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문제를 교훈 삼아 ‘잘못된 자본주의’를 억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낙관적이진 않습니다. 미국 중심의 금융 질서가 흔들리는 마당에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란 꽤 힘들기 때문이죠. 최근 변화되는 점이 있다면 유럽 국가들이 유럽 주도의 세계금융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활발하게 의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0월 워싱턴 ‘서밋(summit: 서방 7개국 정상회담)’에서부터 이들 국가를 중심으로 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로 세계경제는 2009년 가을까지는 0% 성장을 보일 것입니다. 1~2%대의 성장도 잘하면 가능합니다. 2009년 후반기부터 천천히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보입니다.재정 확대는 긴급한 상황을 벗어나는데 필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와 연결된 투자입니다. 눈앞의 경기 부양책만으로는 효과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한국 일본 중국을 축으로 하는 아시아 국가의 금융 협조, 즉 아시아판 국제통화기금(IMF) 구상과 같은 제휴가 필요합니다. 또한 유럽연합(EU) 공동 프로젝트처럼 폭넓은 의미의 아시아 지역 이익에 부합하는 공동 프로젝트 추진이 필요합니다.특히 국가 간의 산업 기술 공유와 협력 등이 필요합니다. 유럽은 최첨단 에어버스 비행기를 제조하는데 여러 국가가 참여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한국과 일본도 우주산업 등 새로운 분야에서 힘을 합쳐야 합니다.아시아 신흥 국가들의 약진과 유럽의 견제로 점차 국제 금융시장 재편을 추구하는 신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국제적 사안을 놓고 자기 나라를 배제하는 것에 매우 신경질적입니다. 미국이 원하는 건 ‘분단 통치(divide and rule)’입니다. 상대를 분리시켜 힘을 약하게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뜻합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미국이 중국과 함께 남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한 예입니다. 그래서 미국을 제외하고 말하긴 힘듭니다. 어떤 기구를 만들자는 얘기도 그렇지만 한국, 일본과 다양한 방면에서 공조를 유도해야 하며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을 끌어들여 아·태지역의 트라이앵글 경제 체제를 구축해야 합니다.한국은 무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7년 76%에 달했지만 일본은 28%에 그쳤습니다. 과도한 대외 의존이 한국의 문제입니다. 게다가 한국은 금융 시스템의 기반이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위기는 10년 전과는 다릅니다. 삼성 현대 LG 등 기업경영 마인드가 10년 전과 다르고 경영 풍토도 달라졌습니다.비관할 일은 아닙니다. 올해 중국의 자동차 판매 대수는 950만 대로 지난해보다 더 많이 팔릴 것입니다. 우리들은 브라질 러시아 등 브릭스(BRICs) 국가의 소비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특히 일본이 세계시장 경제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은 한 단계 발전된 세련된 기술을 개발하고 축적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대로 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런 인재들이 기술자가 되고 여러 분야에서 활동해 전문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뚤어진 자본주의가 아닌 올바른 금융자본주의를 터득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한국 경제는 현대 LG 삼성 등 소수의 특정 대기업 집단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것이 문제입니다. 시장 기반이 넓고 튼튼한 플랫폼형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1947년 홋카이도 출생. 와세다대 대학원 정치연구과 석사.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근무. 미쓰이물산 워싱턴 사무소장. 일본종합연구소 이사장. 와세다대 아시아태평양 연구과 교수(현). 일본종합연구소 회장(현). 미쓰이물산전략연구소 소장(현).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