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알랭 드 보통 ‘불안’루소 ‘인간불평등 기원론’볼턴 홀 ‘3에이커와 자유(Three Acres and Liberty)’“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란다!”1892년 ‘펀치(Punch)’지에는 이런 내용의 만화가 실렸다. 봄날 어머니와 딸이 런던의 하이드 파크를 걷고 있는데 이들 옆으로 다른 집안사람들이 가고 있었다. 이들을 보고 딸이 “엄마, 스파이서 윌콕스 집안사람들이 가네요.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부르는 게 좋을까요?”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안 되지, 얘야”라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윌콕스가는 무엇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마도 재산과 사회적 지위, 명성이 아니었을까.여기서 어머니는 전형적인 ‘속물’에 해당한다. 속물은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우리 자신이 속물적 전술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부인하기 힘들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알랭 드 보통이 쓴 ‘불안(이레)’을 읽다 보면 누구나 속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아니 사회가 속물근성(snobbery)을 갖고 살아가도록 부추긴다. 더 많은 물질적인 부와 더 높은 사회적 지위, 더 높은 권력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이 책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겪는 끝없는 불안의 징후는 사회적 지위의 추구로 인해 야기된다. 높은 지위를 구하려는 동기는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는 것. 이 세 가지가 있으면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 존경을 받고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불안은 바로 여기서 싹튼다.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등으로 인해 불안한 것이다.=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에는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이 포함되며 남들에게 먼저 배려 받고 귀중하게 여겨진다는 느낌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런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초대, 아첨, 웃음, 경의, 관심을 통해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높은 지위가 주는 유익은 물질적 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부의 창조를 경제적인 이유만 가지고 설명하려 할 때마다 그들의 노력은 이상해 보일 뿐이다. 그들은 돈만큼이나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존경을 추구한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누가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면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존재에 주목하고, 우리 이름을 기억해 주고, 우리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고, 약점이 있어도 관대하게 받아 주고, 요구가 있으면 들어 주기 때문이다. 반면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밟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아니라 경멸의 눈길을 주는 것이다.알랭 드 보통은 특유의 ‘사랑론’으로 부와 지위를 추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사람들은 더 사랑받기 위해 부자가 되고 지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가족에서 나타나든, 성적 관계에서 나타나든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사람들은 언제 불안을 느낄까. 이 책에서는 “불안은 무엇보다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와 나누는 대화, 성공을 거둔 절친한 친구에 관한 신문기사 등으로 유발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불안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 질투를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나타내는 것 역시 사회적으로 경솔한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안은 어떤 표정으로 나타날까.“보통 어디에 몰두한 듯한 눈길, 부서질 것 같은 미소,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을 들은 뒤 이어지는 유난히 긴 침묵 등으로 간간이 나타날 뿐이다.”연말 동창회 모임이나 친구를 만나 다른 친구의 성공한 이야기를 들을 때 이런 표정을 짓는다면 불안의 얼굴을 나타내는 것이 되므로, 요주의!= 부가 혈연과 연줄을 따라 세대에서 세대로 내려가던 때에는 돈이 부자 부모에게 태어났다는 것 외에 어떠한 미덕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경제적 능력주의 등장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불운하다’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됐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루소의 벌거벗은 야만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아주 적은 것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큰 부를 누릴 수 있었다.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부는 재산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부와 지위를 탐하는 갈망이 지나치다. 결국 그 갈망이 사람을 잡는다. 부에 대한 집착과 스트레스로 암에 걸리고 건강을 잃는다. 차라리 루소가 말한 ‘벌거벗은 야만인’으로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부와 지위 추구로 인한 불안에서 아예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볼턴 홀이 1907년에 출간한 ‘3에이커와 자유(Three Acres and Liberty)’에서 위안과 비책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당시 출간되자마자 단번에 미국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홀은 독자에게 사무실이나 공장을 떠나 미국 중부에서 농지 3에이커를 적당한 가격에 사라고 권한다. 이 정도 면적이면 4인 가족이 먹고살 만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소박하지만 편안한 집을 유지할 수 있다. 아첨과 협상으로 동료나 상사와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책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1800년대 미국 노동력 가운데 20%가 고용 노동자였지만 1900년대에는 50%, 2000년대에는 90%가 되었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이 책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직장인들이 봐야 할 책이 아닐는지.=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강박관념처럼 따라붙는 불안을 이겨내려면 ‘죽음’을 생각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집트에서는 잔치가 끝날 무렵 참석자들이 거나해져 있을 때 하인들이 들것에 해골을 담아 연회장 탁자 사이를 돌아다니는 관습이 있었다. 참석자들은 그것을 보고 잔치판에서 더 강렬한 즐거움을 맛보았을까, 아니면 새삼 심각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을까.= 죽음을 생각하면 사교 생활에 진정성이 찾아온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 것인지 생각해 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