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팔남매 중 다섯째다. 많은 이들이 형제가 많다고 놀라지만 내가 자란 당시는 6·25전쟁 이후여서 형제간이 많은 집은 다반사였다. 물론 내가 마지막 자식이 될 수도 있었지만 양다리가 불편한 나를 위해 아버지는 형제라도 많으면 덜 외롭겠다는 생각으로 내 밑으로 세 명의 형제를 더 두신 것 같다.18개월, 시름시름 앓았던 것이 소아마비였다. 병든 아들의 다리를 고치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업고 전국의 용하다는 병·의원을 다 다니시며 약 한 재만 쓰면 나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선뜻 집문서를 맡기기를 몇 차례, 꽤 부유하던 집안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오셨던 패물과 돈이 될 만한 집안의 가재도구들을 다 처분해 약값에 보탰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집안 형편도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연못에서 개구리를 잡아오시고 자라를 잡아 나에게 먹이셨지만 이미 약해진 다리가 더 이상 호전되지 않자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반평생 입에도 대지 않던 술을 대시고 가사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가뜩이나 힘든 가계가 더욱 힘들어져 급기야 어머니의 행상으로 열 명의 식구가 겨우 생활하게 됐을 때도 아버지의 방랑은 계속됐다. 하루도 술을 드시지 않은 날이 없었고 술에 취해 늦게 오신 날은 어머니와 자주 다투시던 것이 너무 원망스러웠다.아마 내가 열여섯 살 때라고 기억되는데 그날도 아버지의 귀가가 늦었다. 술 취한 귀가에 또 어머니와 다투실지 몰라 걱정하며 오지 않는 잠을 청했는데 밤 12시 무렵 온 집안을 시끄럽게 하며 아버지가 내가 자는 방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일부러 곤히 잠든 척하고 얼른 아버지가 방을 나가기를 바랐다. 그때 갑자기 뜨끈한 아버지의 손이 내 손을 잡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팔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장애인인 다섯째가 못내 불쌍해서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날마다 술로 추슬렀지만 당신의 잘못으로 자식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자책감에 그날은 목 놓아 우셨다. 아버지의 눈물이 손바닥을 타고 내렸고 이불 속에서 나는 아버지 몰래 울었다. 늘 귀찮게만 하는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나를 위해 흘리는 아버지의 눈물에 내 한낱 어리석은 원망은 그렇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그 일 이후 나는 무조건 아버지에게 효도하고자 했다. 내가 아버지를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장애로 인해 다소 늦게 시작한 학업이었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며 공부했고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 앞에서는 명랑하고 당당한 자세를 보이려고 노력했다. 수많은 우등상과 표창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했고, 아니 우등 그 자체보다 아들의 장애를 극복해 나가는 그 모습에서 아버지는 변화하시는 것 같았다. 장애로 인해 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자전거로 등·하교를 시키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었고 우선 할 일이셨다.아버지의 배려로 어렵게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첫 직업을 가졌을 때 아버지의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다달이 드리는 적은 용돈에 기뻐하며 그 돈으로 동네잔치를 하며 아들을 자랑하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1988년 작은 감기라고 생각한 병원행이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그 자리에서도 혹여 당신은 아들이 번거로울까 병문안도 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2개월 뒤 장애를 가진 사랑하는 아들을 두고 가셨다.이번 추석에는 연휴가 짧아 고향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 묘소를 찾아본 지도 제법 오래됐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 안쓰러워 술로 그 슬픔을 이기고자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는 아들의 손을 잡고 흐느끼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그 사랑이 좌절할 수 있었던 어려운 순간들을 이기게 했다고 생각한다.조만간 고향에 가면 아버지의 묘 옆에 누워 응석을 부리고 싶다.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아버지께 다 일러주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하고 올 생각이다. ‘아버지, 그날 제 손을 타고 내려오던 그 눈물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사랑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겠습니다.’1956년 대구 출생. 계명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구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안심제1종합사회복지관장, 대구미래대학 재활공학과 교수를 거쳐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고용개발원장과 고용촉진 이사를 역임했으며 지난 6월 이사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