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석날, 아버지는 망설이시다 나를 부르셨다. 손에는 누렇게 바랜 작은 한지 두루마리와 뭔가 빼곡히 적힌 대학 노트를 쥐고 계셨다. “내가 죽기 전에 가승(家乘: 족보나 문집 같은 한 집안의 역사적인 기록)을 만들려고 한다. 인쇄소에 알아보니 열 권만 만들어도 200만 원이나 든다고 하는데…”라고 하신다.아버지는 “호적도 없어진다는데 이거라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아이들이 제 뿌리를 알 수 없을 것”이라며 조급해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원고를 받아 노트북 컴퓨터로 편집해 대학 논문 인쇄하는 곳에 맡겨 수십 권을 만들어 드렸다.평소 혈연에 무덤덤하던 나에게 5대조의 후손을 기록하는 가승 편집은 내 뿌리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소박하지만 가장 위대한 역사가 민초들의 삶의 궤적이고, 바로 내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소중한 역사라는 생각이 들자 문득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그러나 모든 민초들이 그렇듯 작은 두루마리 한지는 자신의 세대(世代) 칸을 찾아 자신과 배우자의 이름, 묻힌 곳과 묻힌 날만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묻힌 곳을 보고 이동 경로만 짐작하게 하는 무언의 기록이었다. 갈증과 아쉬움이 컸지만 이 말없는 기록은 ‘아버지들의 이야기는 네 마음이 만들어 줄 것’이라는 말을 들려주고 있었다.아버지는 올해 일흔아홉이시다. 소박하고 욕심이 없어서 늘 집안의 중요한 프로젝트는 어머니가 배후에서 추진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젊은 날 할아버지 곁을 떠날 수 없어 고향인 신안의 한 섬에서 면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그곳에서 오십이 안 되어 부면장으로 명예퇴직을 하셨다.그나마 우리 집은 아버지가 월급을 받아서 보릿고개를 겪던 이웃보다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또래 친구들과 달리 나는 부모에 대한 애증이 적었다. 청소년 시절 나는 자신의 생을 위해서만 성장하고 건방지기까지 했던 터라 이런저런 생각으로 아버지를 멀리했던 것 같다.그래도 아버지는 항상 묵묵히 지켜만 볼 뿐 말이 없으셨다. 고등학교 때 징계를 받게 돼 섬에서 목포의 학교로 불려오셨을 때도, 대학 때 학생운동으로 감옥에까지 갔을 때도, 노조와 관련돼 해고됐을 때도 말이 없으셨다.내 결혼식 날, 식장으로 떠나려 하는데 아버지가 부르셨다. 안방 작은 찻상에는 정화수가 올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고향 쪽을 향해 할아버지께 절을 올리라고 하셨다. 내가 절을 올리고 나자 묵묵히 내 등만 두드리시고는 가라고 하셨다. 삼십을 훨씬 넘기고도 안정된 직장도 없이 결혼해 집을 떠나는 아들, 이런 아들이 당신의 아버지께 일가를 이루고자 독립을 고하는 모습을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셨을까.그런데 결혼한 지 두 해도 못 돼 다니던 잡지사가 문을 닫게 됐다. 나는 사법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네가 고시 공부를 할까봐 법대를 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라고 하시더니 말없이 내 결정을 지지해 줬다. 얼마 안 돼 변리사 시험으로 바꿨지만 수험 생활은 길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수험 기간 내내 당신의 연금을 쪼개 점심값으로 보내 주셨다.지금도 고향에는 아버지가 나 때문에 명예퇴직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보안관찰 대상인 아들로 인해 도청에 불려 가셨고, 그리고 얼마 안 돼 5년이나 정년을 남긴 채 물러나 서울로 올라 오셨기 때문이다.몇 해 전 추석날, 아버지의 낡은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아버지의 명예퇴임식 사진을 발견했다. 장남인 나는 없고 농사짓던 고향 사촌 동생들과 어머니만 아버지의 명예퇴임식장을 쓸쓸히 지키고 있는 자리였다. 한 줄기 싸한 바람이 내 마음 속으로 불어왔다.올해도 추석이 다가온다. 이번 추석에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무언의 기록으로 남게 될 그 이야기를 가슴속에 담고 싶다.1959년 전남 신안 출생. 평화방송 사회부 기자 등을 거쳐 변리사가 되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저작권법학회 감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