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 인플레 확산 우려

국제 원자재 가격이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산업 현장 전반에 인플레이션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항공유, 벙커C유, 경유 등 연료 가격의 동반 상승으로 해상 운임에 이어 항공화물 운임까지 급등세가 이어지고 있다. 육상 운송업자들의 모임인 화물연대는 연료인 경유 가격 급등으로 채산성을 맞추기 어렵게 되자 ‘운임 현실화’를 요구하며 6월 중 총파업을 예고, 수출입 업체들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이 같은 화물연대의 움직임은 최근 경유 값이 휘발유 값보다 높아져 정부가 지급하는 유류 보조금으로는 보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화물연대의 상급 단체인 운수노조는 최근 국무총리실에 △보조금 지급 확대 △정유사에 대한 규제 강화 △대중교통의 공공성 강화 △에너지 수급 구조의 다변화 △표준 운임제 도입 등의 요구안을 전달한 상태다. 박상현 화물연대 법규부장은 “6월 10일까지 정부가 요구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곧바로 파업을 위한 찬반 투표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화물연대가 본부 차원의 총파업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산하 지회 차원의 개별 파업이 시작된 곳도 있다. 화물연대 경남지부 창원동부 지회는 5월 23일부터 경유가 상승에 따른 운송료 인상을 요구하며 자체적인 파업에 들어갔다.하이로지스틱스 분회 소속 화물 개인 사업자 170여 명과 경남지부 조합원 등 300여 명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LG전자 물류 대행업체인 하이로지스틱스에 대해 운송료 23.4% 인상과 근무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이로지스틱스는 LG전자 창원 공장과 오티스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보관, 운송하는 물류센터다. 이에 따라 이곳을 통해 하루 평균 300여 대 분량의 화물이 운송되기 때문에 당분간 물류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대한통운 한진 동부익스프레스 세방 동방 KCTC 등 육상 운송 분야 ‘빅6’은 비상 체제에 들어갔다. 대한통운이 자체적으로 트럭 2000대가량을 보유하고 있을 뿐 나머지 업체들은 비용 절감 차원에서 화물 자동차를 보유한 개인 차주와 따로 계약하고 있어 직격탄을 피하기 어려운 형편이다.업계 관계자는 “15~25톤 규모의 트럭은 대부분 화물연대에 소속돼 있기 때문에 개인 차주를 추가로 확보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화물연대의 총파업이 시작될 경우 육상 운송 업체들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통운 관계자는 “일단 급한 물건은 미리 수송해 두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며 “트럭과 항만 컨테이너 차량 운전사들도 화물연대의 파업에 참여하면 운송업체로서는 물자 수송을 ‘올스톱’해야 할 판”이라고 밝혔다.해외에 제품을 수출하거나 원자재를 들여오는 업체들도 비상이 걸렸다. 육상 운송업체들이 파업 여파로 화물을 제때 운송하지 못하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용장에 약정된 선적 기일이 명기돼 있어 화물을 제때 선적하지 않으면 클레임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며 수출 일정 전반에도 차질이 생긴다.‘서민유’로 불리는 경유 값이 폭등하면서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화물연대가 고유가 대책과 운송료 인상 등을 요구하며 6월 대규모 파업을 예고한 것은 당장 해결해야 할 숙제다.국토해양부는 그동안 화물연대가 요구하고 있는 유가 보조금 지급 연장 및 면세유 지급 등에 대해 기획재정부와 협의를 진행해 왔다. 6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실시되는 유가 보조금 지급을 2년 추가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화물연대 측의 면세유 지급 요구에 대해 정부의 유류 기본 정책 틀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국토부 관계자는 “화물연대와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화물연대 측이 확대간부회의와 대의원 대회 등을 거쳐야 하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접점을 찾을 시간적 여유가 없지 않다”며 “현재 제반 여건이 과거와 달라 물류 대란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고민이 많다”고 전했다.하지만 정부로서도 근본 문제인 경유 값 폭등을 멈출 뾰족한 방안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5월 26일 현재 경유 소비자가는 l리터당 1857.4원(전국 주유소 평균 판매가)으로 4월 평균가(1611.13원)에 비해 15.3%나 급등했다. 세계적으로 경유 수요가 늘면서 기준 시장인 싱가포르에서 경유와 휘발유의 가격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유 등 국내 유가는 싱가포르 현물 시장가에 연동해 정해진다.원자재발(發) 인플레이션 공포가 산업 현장을 휩쓸면서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원자재 값 폭등이 외부 변수라 기업들로선 사실상 뾰족한 대책이 있을 수 없다. 규모가 작은 화학 및 조선업체들 사이에서는 ‘고사 직전’이라는 비명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중소 조선업체들은 기본 재료인 후판을 구하지 못해 일감을 떠안고도 조업을 단축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포스코 후판이 싸긴 하지만 중소업체들엔 ‘그림의 떡’이다. 대기업들에 주기에도 빠듯할 만큼 물량이 달리기 때문이다.대한항공은 지난 1분기 유류비로 8100억 원을 썼다. 지난해 같은 기간 5400억 원보다 50% 급증했다. 아시아나항공은 매출의 32%인 3000억 원을 항공기 기름을 사는 데 사용했다. 지난해 1분기엔 매출 대비 유류비 비중이 24%였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지난해 1분기 1308억 원이던 순익이 올 1분기 3255억 원 적자로 곤두박질쳤다”고 말했다.철근 가격도 오르면서 국내외 건설 사업이 곳곳에서 차질을 빚고 있다. 철근 수급이 어렵고 공사비 급등으로 수지 타산이 맞지 않으면서 기존에 계획했던 건설 사업을 중단하거나 사업 추진을 연기하는 사례가 잇따르는 추세다.6월 철근(고장력 10mm 기준) 가격은 톤당 100만 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철근 가격은 현대제철 동국제강 등 국내 제철 회사들이 5월 13일 이후 출하분부터 톤당 86만1000원에서 95만1000원으로 9만 원 인상했다.가격이 오르면서 건설 현장에서는 철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건설사들이 추가 상승에 대비해 ‘사재기’하는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일부 건설사는 가격이 비싼 외국산 철강재를 구해 쓰고 있다. 용인 죽전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올 초부터 중국산 철근을 사용하고 있다. 10mm 기준으로 톤당 국산 단가가 95만 원인데 비해 중국산은 96만~97만 원에 달하지만 국산만으로는 필요한 물량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철강 업체 관계자는 “최근 중국 지진으로 철근 수요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며 “당분간 고철과 철근 가격은 오름세를 지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분양 시장 침체로 미분양 주택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철근 가격 인상까지 겹치면서 건설사들의 경영 악화가 심화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이에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국토해양부는 특정 자재 가격이 기준 이상으로 올랐을 때 건축비 조정 기간(매 6개월) 이전이라도 상승된 가격을 반영, 건축비를 조정하는 ‘단품 슬라이딩 제도’를 이르면 6월부터 도입하기로 했다. 자재 기준 가격을 올려 분양가에 반영해 주겠다는 뜻이다.건설업계로선 건축비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이는 고스란히 분양가 상승으로 이어져 소비자들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김재창 기자 changs@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