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계시는 아버지는 이제 벼농사를 짓지 않으신다.어쩌면 지난해 농사가 아버지의 일생에 마지막 벼농사였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아버지는 너무 오래 일을 하셨다. 그것으로 다섯 자식의 대학을 가르쳤다. 힘들어도 그래도 농사가 조금이나마 제대로 대접을 받았던 시절의 일이었다.마을 앞 삼천 평의 논은 그냥 묵힐 수가 없어서 누가 농사를 지을 사람이 있으면 지으라고 동네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자 지원자가 나섰다. 집 안에 트랙터와 각종 농기계를 가지고 마을에서 제법 큰 규모로 농사를 짓는, 한 집안의 아저씨가 짓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길옆에 있는 천 평짜리 밭은 누구에게 말하기도 무엇해 그냥 묵히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해 봄, 집안 아저씨가 자기 집 밭을 갈면서 길옆의 그 밭도 함께 갈아놓았다.“그러니 어쩌겠냐? 이제 농사 안 짓겠다고 논까지 남 주고 말았는데, 저렇게 밭을 갈아놓으니 말이다. 그 밭을 왜 갈았냐니까 동네 길 옆에 밭을 그냥 묵혀 두면 다른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흉을 볼까봐 갈아 놓았다는데 내가 뭐라겠냐? 그래서 한 해만 더 그 밭 짓기로 했다.”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밭에 무얼 심었는지, 어느 자식도 몰랐다. 묻지도 않았다. 그걸 안 것은 작년 초가을의 일이었다. 내가 무슨 일론가 시골집에 내려갔는데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아랫말 석정이가 밭을 갈아 놓고는 거기에 밭벼를 심으면 좋겠다는구나. 그런데 집에 밭벼 씨가 있어야 말이지. 그걸 구하느라 다른 밭보다 보름 늦게 씨를 뿌렸는데, 제때 씨를 뿌린 다른 밭은 벌써 이삭이 올라와 낟알이 익는데, 우리 집 밭은 이제 이삭이 막 팼단다. 그리로 지나다닐 때마다 요즘 애비는 여간 남세스럽지 않다.”무엇이 남세스럽냐고 내가 물었다.“사람들이 대체 이 밭의 주인은 농사를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흉을 볼까봐 말이다. 저게 날씨가 좋으면 제대로 익지만, 비가 자주 오고 냉해라도 입으면 억새마냥 새하얗게 빈 이삭으로 밭에 그대로 꼿꼿하게 서 있을 텐데, 그러면 그때는 또 그게 무슨 창피겠느냐?”다행히 지난해 가을 날씨가 좋아 늦게 팬 벼도 낟알이 잘 여물어 아버지의 마지막 벼농사는 그런대로 평년작을 이뤘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고 했다.평생 농사를 지어온 아버지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런 것이었다. 자식이 바르게 자라지 못했을 때, 그리고 다른 논밭의 곡식은 다 제대로 자랐는데 내 논밭의 농사만 때를 못 맞춰 낟알이 제대로 익지 않을 때 아버지는 부끄럽다고 했다.등이 휘게 일을 해서 자식을 키웠고, 그렇게 키운 자식들 대부분 보모보다 많이 배우고, 또 어머니보다 많이 배운 며느리를 집안에 들였다. 텃밭에 키운 작물도 좋은 것은 자식들에게 보내고, 어머니 아버지 차지는 언제나 제일 못한 것들이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도 제일 좋은 작물은 시장에 내다 팔아서 자식들의 학비를 댔다.집에서 신는 양말 한 가지 경우를 보더라도 그랬다. 평소 집에서 아버지가 신는 양말은 시골집에 들른 아들들이 벗어놓고 간 것들이다. 미처 새 양말을 꺼내 신을 사이가 없다. 그런데 지난번 아버지 생신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가 짝짝이 양말을 신고 계셨다. 같은 갈색이긴 한데 한쪽은 짙은 갈색이고 한쪽은 연한 갈색이었다. 양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눈이 침침해 같은 색의 연함과 짙음도 잘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차림으로 외출까지 하고 오셨다.“짝짝이 양말을 신고 나갔다 오신 거예요?”라고 물으니 내가 지은 작물이 밭에서 그냥 쓰러지고, 내가 낳은 자식이 제대로 사람값을 못할 때 부끄러운 거지 그런 것은 창피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그러나 등이 굽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 때, 또 비슷한 색깔의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는 아버지의 발을 바라볼 때 아들은 저 희생과 검약으로 오늘에 내가 있었구나 싶어 한편으로는 숙연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다.1958년에 태어났으며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허균작가문학상 남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으로는 소설 ‘수색 그 물빛무늬’, ‘은비령’, ‘19세’ ‘나무’ 등이 있다.이순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