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마다 목욕탕 가는 게 죽기보다 싫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와 같을까. 이제 나도 남녀의 유별을 알고, 세상의 이치를 제법 헤아릴 만한 나이가 되었는데 도대체가 어머니는 어엿하게 성장한 아들의 의사를 눈곱만큼도 존중하지 않는다.“누가 물으면 여섯 살이라고 해야 한다, 알았지? 올해 학교에 들어갔다고 대답하면 안돼!” 싫어요, 목젖까지 올라오는 결기를 간신히 누르며 나는 몇 주 전의 악몽에 시달린다. 이번에도 욕탕에서 우리 반 계집아이를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책상에 삼팔선까지 긋고 남녀칠세부동석을 착실하게 실천하던 짝꿍 혜정이라도 만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지만 더한 공포가 있다. 속으론 여섯 살, 여섯 살 하고 몇 번이나 되뇌었는데 잔뜩 긴장한 목에서 내 의지와는 정반대로 지난번처럼 갑자기 여덟 살이 튀어나온다면.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역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이 날대로 난 잠지를 잡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너 정말 여섯 살 맞니? 하고 묻던 그 뚱뚱한 아줌마를 다시 만난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었지만 어머니의 완력 앞에서 나는 그저 무기력한 중생일 뿐이다.“너, 몇 살이라고?”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몇 번이고 정색을 하고 거듭 확인 절차를 거치는 어머니에게 결국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여섯 살요” 하고 시무룩하게 대답하고 만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또랑또랑한 두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관전하고 있던 누이동생들이 마구 놀려대기 시작한다. “오빠는 거짓말쟁이래, 거짓말쟁이. 우리 오빠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대요.”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위인인지 아버지는 목욕탕을 가지 않았다. 위생과 청결에 있어서 아버지가 하는 수고란 그저 하루에 두 번 세수를 하는 정도가 다인 것처럼 보였다. 할 수 없이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따라 목욕을 다녀야 했다. 사내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린 채 여탕을 들어가야만 하는 자의 비애는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지금 생각하면, 나이를 속여 가면서까지 다 큰 사내아이를 여탕에 데리고 다녀야 했던 어머니의 불편한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다. 미취학 아동에겐 욕비를 받지 않는 혜택이 있긴 했지만 쪼들린 가계부에 한숨을 쉬면서도 당신은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어머니를 따라다닐 수 없을 만큼 커버린 뒤론 혼자서 목욕을 다녔다. 여탕의 악몽에서 해방된 게 무엇보다 다행스럽긴 했지만 남탕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결코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을 끙끙거리며 밀 때마다 함께 와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던지. 아버지가 없는 것도 아닌데, 매번 등 밀어줄 사람을 탐색해야 하는 처지처럼 딱한 것도 없었다.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꽤 오랫동안 적대감을 부러 숨기지 않았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뭔 놈의 소설 시 나부랭이냐 이놈아, 늬 애비가 시장에서 지게질 하고 번 돈이 어떤 돈인데.”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오셔서 하는 푸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다니지 않는 게 틀림없어. 그 아껴 모은 돈으로 꼴좋은 주정뱅이가 되었군. 나는 저런 인생은 싫어. 아버지처럼은 절대 살지 않을 거야!’그런데 그렇게 한껏 냉소했던 아버지가 알코올성 간경화 말기로 쓰러져 눕고 말았다. 한 시간에 한 번씩 하는 관장을 끝낸 뒤 아버지를 업고 병원 욕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아버지의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자국을 보고 말았다. 그것은 지게 자국이었다. 사십년 가깝게 등짐을 지며 살아온 지게꾼의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 자국.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자국이었고 아들에겐 더군다나 어떤 식으로든 물려주고 싶지 않은 상처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그 적막한 등짝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못난 자식의 오랜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다.1998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과 ‘목련전차’가 있음. 신동엽창작상, 이수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손택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