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말 영국의 철강 전문지 메탈블리틴이 발표한 ‘2007년 세계 철강사 순위’는 최근 급변하고 있는 세계 철강 산업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000년대 들어 세계 철강사 순위는 거의 매년 요동쳤다. M&A로 탄생한 낯선 이름의 철강사들이 줄을 이었다. 2007년 순위 역시 마찬가지다.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2006년과 큰 차이를 보인다.우선 중국 철강사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조강 생산 기준 상위 10위에 바오스틸(5위), 샤강(7위), 탕샨(8위), 우한(10위) 등 무려 4개 업체가 포진해 있다. 2006년과 비교해 업체 수도 늘어나고 순위도 상승했다. 영국 코러스를 인수한 타타스틸도 단번에 6위로 뛰어오르며 인도의 저력을 실감나게 한다. 1위 미탈스틸과 2위 아르셀로의 합병으로 탄생한 ‘철강 공룡’ 아르셀로미탈은 1억1640만 톤으로 2위인 신일철(3450만 톤)을 4배 가까이 앞지르는 기염을 토했다. 반면, 20세기 초부터 70년간 세계 최대 철강사로 군림하던 US스틸은 신흥 강자들에 밀려 9위로 내려앉았다. 근대 제철 기술의 발상지인 영국의 제철소들도 타타스틸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그러나 세계 철강 업계의 지각변동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2008년 세계 철강사 순위가 어떻게 달라질지 아직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수많은 M&A 논의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고 중국의 철강 산업 집중화 정책도 탄력을 받고 있다. 내년에는 10위권에 진입한 중국 업체 수가 6개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탈스틸과 아르셀로의 합병으로 저절로 순위가 1계단 상승한 포스코의 위치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중국 철강업은 양적, 질적 측면에서 모두 경쟁력을 빠르게 높여가고 있다. 특히 선진 철강사들의 전유물로 인식돼 온 자동차, 조선, 가전용 철강 제품 분야에서 중국 기업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중국은 발 빠른 설비 확장을 통해 2004년 말 철강 순수입국에서 순수출국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6년에는 일본과 러시아, 유럽연합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철강 수출국 자리에 올라섰다. 중국은 이미 세계 철 생산량의 30%가량을 담당하는 세계 1위의 철강 대국이다. 중국 특수로 호황을 누렸던 세계 철강 업계가 이제는 값싼 중국산 철강 제품의 공습을 우려해야 할 처지가 된 셈이다. 중국은 중앙 정부차원에서 공급 과잉을 우려해 철강 제품의 생산과 수출을 억제하고 있지만 큰 흐름 자체를 돌려놓지는 못하고 있다.중국은 신일철, 아르셀로 등과의 합작사 설립 등을 통한 기술이전으로 조선과 자동차용 고부가가치 강재를 빠른 속도로 자급화하고 있다. 자동차 강판의 경우 중국 최대 철강사인 바오스틸 자동차 강판의 국내 시장점유율이 50% 안팎에 달한다. 철강재의 주요 수요 산업인 건설, 자동차, 가전, 조선 등의 발전이 철강 산업의 고급화, 고부가가치화를 이끌고 있기도 하다.중국은 가전 분야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 1위 생산국이다. 최근에는 수출 이외에도 경제 발전에 따른 농촌 지역의 수요 증대로 내수 소비도 활성화되고 있다. 2005년 중국의 가전 생산량은 전년 대비 8.8% 증가했으나 2006년에는 17.8% 급증했다.조선업 역시 건조 규모로 세계 3위에 올라있다. 최근 범용선 중심에서 초대형 유조선(VLCC), LNG 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의 생산 비중이 높아지고 있어 철강 역시 고강도 광폭후판 등 고부가가치 제품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자동차의 경우 2002년을 기점으로 상하이 광저우 등 연안 도시에서 자동차 대중화 시대, 즉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2010년까지 중국 자동차 생산은 연평균 15%, 승용차는 25%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중국의 철강 생산 급증은 세계 철광석 시장의 질서마저 바꾸어 놓았다. 중국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철광석 시장은 세계 빅3 철광석 회사들이 주도권을 갖는 ‘공급자 시장’으로 전환됐다. 중국은 세계 최대 철광석 수입국이다. 최근 6년 동안 중국의 철강석 수입은 두 배 증가했다. 안정적인 철광석 수급은 중국 철강 산업의 최대 과제로 꼽힐 정도다. 거리가 가깝고 철광석 품질이 우수한 호주는 이미 일본과 한국, 대만 기업이 선점하고 있어 중국은 어쩔 수 없이 브라질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막대한 구매 물량과 시장 잠재력으로 원료 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계속 커지고 있다.현재 중국의 생산 과잉 논란과 관련해 두 가지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다. 중국이 생산 억제에 실패해 과잉 생산 우려가 현실화될 경우 세계 철강 가격은 급락하고 철강사들의 통폐합도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중국이 철강 수급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성공한다면 세계 철강 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올해 대형 철강사들은 경쟁적으로 양적인 규모 확장에 나서고 있다. 세계 최대 철강사인 아르셀로미탈은 현재 1억 1700만 톤인 조강 능력을 2011년까지 1억3000만 톤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2위인 신일철도 2010년까지 4000만 톤 이상의 능력을 확보하기로 했고 3위인 JFE도 3700만 톤 체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이러한 양적 성장 전략은 최근 들어 M&A보다는 합작 투자 형태로 구체화되는 양상이다. 현재 아시아 지역에서는 당장 마땅한 매각 대상 제철소가 없고 일본은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 대책이 도입되고 있어 M&A 추진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자국 내 제철소 간 M&A가 활발한 중국도 아직은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신흥시장 국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아르셀로미탈은 인도 오리사 주와 자르칸트 주에서 신규 제철소 건설과 M&A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M&A 가능성을 꾸준히 탐색하고 있다. 신일철은 그동안 하공정(열연코일·슬래브를 2차 가공해 냉연코일이나 후판을 만드는 공정) 중심 전략에서 벗어나 브라질과 태국 등에서의 상공정(쇳물을 녹여 열연코일·슬래브 등 중간 소재를 만드는 공정)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JFE도 브라질 진출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이와 함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대형 철강사 간의 전략적 제휴 강화 움직임도 두드러진다. 세계 1위 철강사인 아르셀로미탈과 2위인 신일철은 현재 북미와 중국, 유럽에서 합작 또는 기술 제휴를 맺고 있다.또한 신일철은 일본 내에서 스미토코금속, 고베제강과 포괄적 자본 제휴 관계를 강화하고 포스코와 바오스틸, 타타스틸 등 아시아 대형 철강사와의 자본 제휴에도 적극적이다. 신일철은 이를 통해 1억3000만 톤 규모의 ‘질적 연합체’를 구성한다는 전략이다.세계 3위인 JFE도 독일 티센크룹, 미국 AK스틸, 현대제철 등과 기술 및 자본 제휴 관계를 심화하고 있으며 고급강 부문에서는 US스틸과 제휴 관계 강화를 검토하고 있다.이러한 대형 철강사 간 제휴 협력은 철강 업계의 가격 협상력을 높이는 데도 효과적이다. 현재 세계 1위로 올라선 ‘철강 공룡’ 아르셀로미탈이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상위 10개 기업을 합쳐도 30%에 못 미친다. 반면 철광석은 CVRD(브라질), 리오 틴토(호주), BHP빌리튼(호주) 등 3대 공급사가 세계 시장의 79%를 장악하고 있다. 자동차는 ‘빅6’ 완성차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76%에 달하며 조선은 한국의 빅3 조선소가 40%를 차지하고 있다. 시장 지배력과 협상력에서 철강 업체들이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그러나 철강사들이 전략적 제휴에 새삼스럽게 주목하는 가장 큰 목적은 공동 대응을 통해 잠재적인 M&A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특히 많은 철강사들이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사모 펀드와 국부 펀드 등 철강 산업 외부의 인수 위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 2002년 이후 중국발(發) 호황이 시작되면서 철강의 원료인 철광석과 원료탄의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특히 2005년에는 국제 철강 제품 가격 상승으로 원료 수요가 공급사의 설비 능력을 넘어서 가격이 전년 대비 70% 넘게 급등하기도 했다. 2005년 한 해 동안 철광석 가격은 72%, 원료탄 가격은 120% 상승했다.이와 함께 원료 보유국의 위상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일부 국가들은 자국 수요 우선 대응과 자국 업체에 의한 개발 이익 향유 원칙을 강화하고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 수출 억제 또는 금지에 나서기도 한다. 인도는 저품위 철광석의 수출을 금지한 상태며 브라질은 원류 수출을 대가로 자국 내 철강 프로젝트에 대한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철강사들은 제조 원가의 70~80%를 차지하는 제철 원료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확보하는데 사활을 걸고 있다.원료 보유국의 중소형 철강사들도 대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인도의 타타스틸은 현재 2700만 톤 규모인 조강 생산 능력을 2015년까지 5000만 톤, 2020년까지 1억 톤으로 늘린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2008년을 1억 톤 조강 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뉴 데케이드(New Decade)’ 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타타스틸은 올해 잠세드푸르 제철소의 확장 공사에 착수하고 성숙 시장에서의 하공정 부문 M&A에도 나서기로 했다.인도의 국영 철강사인 인도철강공사(SAIL)도 지난해 가동률이 115%에 달할 정도로 설비 확장이 절실한 상황이다. SAIL은 2010년 2600만 톤 규모 달성을 목표로 올해부터 우선 5개 제철소의 고로 증설과 설비 현대화에 나서기로 했다. 이와 함께 2020년까지 총 200억 달러를 투자해 고로 4기를 신설하고 제철소도 추가 건설할 계획이다.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원료 가격의 초강세로 원료 보유국의 철강사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철강사 간의 수익성 양극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2007년 1~9월 원료 보유국 10개 철강사의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25.7%로 세계 빅5 철강사의 14.8%를 10.9% 포인트 추월했다. 원료 보유국 10개 철강사와 세계 빅5 철강사의 매출액 영업이익률 격차는 매년 계속 확대되고 있다.이들 원료 보유국 철강사들은 향후 철강 업계 M&A를 주도할 다크호스로도 꼽힌다. 러시아 최대 철강 업체인 에브라즈(Ezraz)와 브라질 철강사 게르다우(Gerdau)는 이미 공격적인 M&A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협찬: 포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