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에게 따뜻한 추억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 한국의 아버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내 아버지도 가족의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 정작 겨울밤을 함께하긴 힘들었다.나에게 아버지는 엄한 가장으로 각인돼 있다. 5분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 형인 나에게 아버지는 장남의 역할을 누차 강조하셨고 동생들의 잘못은 고스란히 질타로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너무나 억울한 마음을 어머니에게 토로했지만 어머니는 그저 내 등을 쓸어 주실 뿐이었다. 아마 20년 후에는 이해할 것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던 것 같다.고3 수험생 시절, 아버지는 미국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서울에서 시험을 보는 동생과 달리 나는 지방으로 떠나야 했다. 시험 전날, 아버지는 급히 귀국해 내 지방행을 직접 챙기셨고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났다. 늘 엄하셨던 분이라 차를 타고 가는 길 내내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됐다.아버지는 시험 준비로 예민해 있었던 나에게 신경을 많이 쓰셨다. 2평 남짓한 방을 빌려서 마지막 시험 준비를 하던 내가 시계를 본 시간이 새벽 2시 정도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곁에 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공부에 작은 소리라도 신경 쓰일까, 그 추운 날 밖에서 산보를 하고 계셨다. 문을 열자 공부 끝났느냐며 그만 자자고 하시는 말씀이 왜 그리 춥게 느껴졌던지.아버지의 응원에도 나는 원했던 학과에 입학하지 못했다. 2년간 방황의 시간을 거치고 군에 입대한 나는, 군에서 철이 들었던 모양이다. 관광경영학을 전공했던 아버지의 길을 따르고자 상병 말년에 아버지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당시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꾸려 가시던 아버지는 바쁜 일정을 모두 뒤로하고 다음날 면회를 오셔서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잠들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으시던 아버지는 다음 날 귀대하는 내게 “제대 후 신중하게 다시 논의하자. 지금은 군 생활에만 매진하라”고 당부하셨다. 제대 후 편입학원을 다니다가 다시 복학을 결정하는 방황의 시간에도 아버지는 내 결정을 응원하셨고, 단 한 번도 아들의 꿈과 열정을 꺾지 않으셨다.사회에 발을 들이고 이름 없는 회사를 전전할 때도 아버지는 장남이 걷는 길이 값지고 귀한 길이라며 가족들에게 늘 기도를 부탁하셨다. 만약 그 묵묵한 응원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지금 이렇게 아버지를 기억하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지금 생각하면 그 자신이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장남인 나에게 유난히 엄하셨지만, 분명 또 한편으로는 늘 관대하셨다. 동생들의 진로에는 많은 신경을 쓰셨지만, 내 선택은 늘 믿고 존중해주셨다. 그리고 결혼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나는 아버지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지난해 오랜 직장을 그만두시고 정년퇴직하신 아버지. 한창 일하실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시는 모습에 속으로 눈물도 많이 흘렸다. 결국 자격증을 따겠다고 결심하시고 지금은 열심히 학원을 다니신다.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응원할 시간이다. ‘힘내시라’는 한 마디 말보다는 아버지가 준비하시는 제2의 인생을 묵묵히 응원하려 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내 꿈의 절반이 아버지의 몫이라면 앞으로 펼쳐질 아버지의 꿈에 내 꿈을 보태는 것이 내 즐거움이다. 그저 묵묵히 서로를 책임지면서 살아가는 부자의 모습이 나에게는 더 익숙하고 사랑스럽다. 나의 꿈만큼 아버님의 꿈이 소중하다는 믿음 하나면 충분한 일일 테니까.아들이 철이 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아들의 큰 지붕이 아버지라면, 늙은 아버지의 넉넉한 벗은 아들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살가운 말 한마디보다는 굳은 믿음과 꿈을 향한 신념의 벗으로 아버지 곁에 서고 싶다. 그 길이 내가 아들로 아버지와 만나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는다.‘아버지의 그 꿈을 믿습니다. 함께 꿈을 꿀 수 있는 오늘이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넉넉한 응원과 아름다운 꿈을 느끼게 해주셔서. 함께하겠습니다. 그 꿈이 열매 맺는 날까지.’문화 상품 전략 및 기획 전문가. 문화 마케팅 전문 기업 풍류일가의 대표로 있으면서 서울아트스쿨 문화예술원 교학부장 겸 주임교수로 활동 중이다. ‘위대한 기업의 선택, 문화마케팅’등의 저서가 있다.김우정·풍류일가 대표 ceo@lut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