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30년 동안 아버지와 별거 아닌 별거 생활을 해 왔다.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대도시로의 유학 생활, 미국으로의 유학 생활, 그리고 나의 가정생활까지 아버지와 직접적인 대면이 지금까지 한 번에 3일 이상 넘겨본 적이 없다.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에서 함께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분리된 생활공간에서 각자 생활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부자 관계’라고 해도 변명하지 못할 입장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아버지에 대해 한편으론 웃음 짓게, 또 한편으론 눈물짓게 하는 그런 기억들이 존재한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초등학교 시절 내가 본 아버지는 대단한 워커홀릭(workaholic)이었다. 여유롭지 못했던 가정경제와 4남 3녀의 맏이라는 책임감 등이 당신에게 단 한순간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리고 가난 탓에 완전한 정규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신 것을 큰 상처로 안고 사셨다.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아버지의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아버지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을 무척 슬퍼하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이런 상처가 나를 비롯한 자식들에게 항상 최고의 교육을 강조했던 중요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또한 이 때문에 당신만을 위한 여유 시간을 갖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아버지는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일일이 일러 주시지 않았다. 충분히 서로 대화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이기는 하겠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어 주신 것 같다. 대신 이에 따른 분명한 책임을 요구하는 방임적 리더십을 발휘하신 듯하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처음 시작할 때, 그리고 나중에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려 할 때도 “그것이 필요하냐? 그렇다면 책임지고 잘 해라”라는 말씀이 전부였다. 물론 나에게는 엄청난 중압감으로 작용했다.아버지에게 이야기하기 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그에 따른 대책 등을 마련하지 않고는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는데,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두렵다. 일상적인 이야기이건 심각한 이야기이건 상관없이 일단 말씀을 드리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항상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말씀드린 내용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나를 믿고 항상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시는 것은 내가 나름대로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당신 스스로 믿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이야기하고 나서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도 꾸중보다는 오히려 ‘다음엔 잘 하도록 해라’는 말씀 한마디뿐이다. 나에겐 그러한 말씀이 더욱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게 하는 무언의 채찍질이 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이렇게 무뚝뚝하시고 긴 말씀을 않는 아버지는 가끔씩 행동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신다. 나에게 당신이 해 놓으신 일들의 결과물들을 직접 보여주시며 “이거 내가 한 것이다”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신다. 어쩌면 나에게 ‘이신작칙(以身作則)’, 즉 몸소 행동으로서 모범을 보여주길 원하시는 것 같다.아들, 딸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까지 나의 아버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무척이나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너무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그랬으려니 하고 자위해 보지만 한편으론 내가 정말 무심했었구나 하고 자책해 본다. 아마도 아버지는 당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항상 조용히, 내 주변에 머무르 면서 현재의 나를 만들어내신 게 아닌가 싶다.말로서 교류한 적이 별로 없는 나와 아버지. 한편으론 참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그 마음도 싹 가신다.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어 놓으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셨던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내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방임적 리더십, 그리고 이신작칙의 행동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방법은 옳았다. 먼 훗날 나의 아이들도 이런 아버지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까.강기두·숭실대 경영학부 교수미 일리노이주립대 경영학 박사 취득 후 2005년부터 숭실대에 재직 중이다. 서비스 마케팅, 서비스 품질 등에 관한 연구에 주력하고 있으며 신문, 잡지 등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