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글로벌 상생’인가

최근 들어 기업의 성장과 관련해 ‘생태계(Ecosystem)’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연약한 초식동물과 거대한 육식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자연 상태계의 순환 시스템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협력하고 창업 벤처에서 출발해 중견기업으로 커나가는 성장 사이클이 전체적으로 원활하게 작동해야만 개별 기업의 발전은 물론 경제 전반의 지속 가능한 성장도 가능하다는 것이다.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새로운 인식이 ‘기업 생태계’ 혹은 ‘산업 생태계’의 위기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2000년대 들어 심각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기업의 양극화 문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당수 중소기업들은 새로운 성장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말라 죽어가고 있다. 맨손으로 창업해 거대 기업을 일궈낸 성공 스토리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황재선 소프트뱅크미디어랩 책임연구원은 “2003년 이후 국내에 나온 신규 인터넷 서비스 중 현재 상위 30위권에 드는 곳은 판도라TV와 티스토리 단 2개뿐”이라며 “그 외에 성공한 신규 서비스는 사실상 없다”고 말한다. 몇몇 인터넷 포털을 중심으로 한 집중화가 가속화되면서 신생 서비스는 제대로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투자도 이뤄지지 않고 신규 서비스 자체도 잘 나오지 않는다. 생태계 순환 시스템의 한쪽이 막힌 것이다.물론 이는 정보기술(IT) 업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반 제조업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중소기업 육성’, ‘부품산업 육성’은 수십 년째 되풀이되는 해묵은 과제지만 아직도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한국 제조업의 취약한 하부 구조는 세계시장에서 뛰고 있는 국내 대기업의 발목을 잡는 약한 고리로 작용하고 있다. 무너진 생태계의 복원이 긴급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건강한 생태계를 복원하려면 가장 먼저 막힌 곳을 뚫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글로벌 상생 모델’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상생은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과 국내 중소·중견 기업이 협력적 파트너십을 통해 세계시장에 동반 진출하는 형태다. 이를 위해 다국적 기업은 자신들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마케팅 노하우, 그리고 기술과 자금 등을 지원해 준다. 글로벌 상생 프로그램은 원활하게 가동되기만 한다면 정체 상태에 빠진 수많은 국내 중소기업들에 새로운 성장과 도약의 기회를 가져다 줄 수 있다.글로벌 상생은 세계 곳곳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최대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세계가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지금, 현지 기업과의 상생 없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선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상생을 장기 성장의 필수 조건으로 보고 공동 연구개발(R&D), 벤처 투자 등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다.국내 중소기업들에 글로벌 상생이 갖는 의미는 기업의 성장곡선을 들여다보면 한층 분명해진다. KOTRA 산하 인베스트코리아 투자협력지원팀 관계자는 “창업 후 일정 단계가 되면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성장 정체를 겪게 된다”고 말한다. 가장 큰 원인은 국내 내수 시장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중소기업이 밟는 성장 과정은 이렇다. 국내 중소기업은 창업과 함께 대부분 대기업 납품을 통해 매출액 100억~200억 원 수준까지는 순조롭게 커나간다. 운이 좋으면 이 단계에서 코스닥시장 상장에 성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후 매출 정체가 본격화된다. 제2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외시장 개척이 필수적이지만 구체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조창용 정보통신국제협력진흥원 책임연구원은 “어설픈 해외 바이어를 한두 번 만난다고 해외 진출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세계시장의 최신 트렌드를 읽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면 만만치 않은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일부 다국적 기업을 중심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글로벌 상생 프로그램은 국내 중소기업들이 안고 있는 이러한 고민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내 업체들이 세계시장에서 새로운 성장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도록 이미 검증된 광범위한 글로벌 네트워크와 각종 성공 노하우를 제공해 준다. 지석구 소프트웨어진흥원 산업진흥단장은 “세계 톱클래스의 선수가 우리나라 초·중학교 선수를 직접 지도해 주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마케팅 노하우와 최신 기술 트렌드에 대한 최고 수준의 정선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글로벌 기업의 가이드를 받으면 세계시장에서의 성공 확률은 훨씬 높아진다.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사례를 연구하고 있는 김수욱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다국적기업들의 글로벌 상생 프로그램 도입 움직임은 국내 대기업들 사이에 상생 협력 분위기를 더욱 확산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국내 대기업에만 목을 매 온 중소기업들이 다국적기업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글로벌 상생은 비단 해외시장 진출을 꿈꾸는 중소기업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내수 중심의 중소기업도 세계화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이준호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미 정교한 글로벌 가치 사슬이 현실적으로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며 “국내에서 활동하는 중소기업들도 그러한 가치 사슬 안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거대한 글로벌 아웃소싱 시스템과 최신 흐름을 잘 이해하고 그 안에 편입돼 들어가 생존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과의 적극적인 협력은 이러한 글로벌 가치 사슬을 활용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물론 글로벌 상생의 구체적인 형태는 다양하다. 다국적 기업이 기술과 네트워크, 노하우를 지원해 주는 것도 있고 아예 자본 참여를 통해 지분을 인수하는 경우도 있다. 인베스트코리아 투자협력지원팀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피땀 흘려 일군 회사의 경영권을 빼앗긴다는 생각 때문에 중소기업 오너들이 자본 참여를 꺼렸지만 최근에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며 “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전략적 자본 유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 네트워크 지원이든, 전략적 자본 참여든 다국적기업의 도움을 받아 한 단계 도약을 꿈꾼다는 것은 마찬가지다.대표적인 글로벌 상생 프로그램인 한국마이크로소프트의 ‘한국 소프트웨어 생태계 프로젝트’는 국내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를 세계시장에서 성공한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한국MS는 지금까지 34개 국내 IT 벤처를 선정해 글로벌 수준의 개발 역량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영업과 마케팅은 물론 기술이전과 해외 네트워크 등 전천후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후지쯔의 지원을 받아 일본 시장에 진출한 보안 솔루션 업체 티에스온넷도 주목할 만한 사례다. 이 업체는 지난 2006년 후지쯔가 유망 벤처기업 육성을 위해 조성한 ‘후지쯔 코퍼레이트 펀드’로부터 10억 원(11%)의 투자를 받았다. 일본에서 판매되는 후지쯔의 서버 제품에 티에스온넷의 보안 프로그램이 탑재돼 팔리고 있다. 이 업체 임연호 사장은 “일본 시장을 발판으로 미국과 유럽 시장도 노크할 계획”이라고 말한다.글로벌 상생은 다국적기업의 사회 공헌이나 단순한 기여 활동과는 분명히 구별돼야 한다. 그런 형태의 접근 방법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서로가 ‘윈-윈’하는 비즈니스 논리가 바탕이 돼야 한다. 김수욱 교수는 “글로벌 상생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는 국내 중소기업들도 내부적으로 혁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