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 과천 관가는 과연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이곳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하다”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OOO 차관보가 어느 쪽에 가서 줄섰네, 무슨 공약은 XXX 국장이 슬쩍 찔러 준 자료로 만든 것이네” 등등의 얘기들이 나올 법한 시기지만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전혀 그런 게 없어 기자들이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다. 일각에서는 “지금 대선판이 워낙 오리무중이라 어느 한 쪽에 ‘베팅’할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한다.고위급이 아닌 4급 이하 공무원들은 지금이 정권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특히 과장급(일부 부처는 팀장) 공무원들은 막바지 국회에서 자기 부처가 올린 법안이 하나라도 더 통과되도록 하기 위해 과천과 여의도를 오가며 분주히 뛰는 모습이다. 여태껏 대선이 있는 해는 ‘경제부처의 비수기(?)’로 여겨졌다. “정권 바뀌면 어차피 크게 한 번 뒤집힐 텐데”라면서 크게 움직이지 않고 정권 말 느슨한 분위기에 묻혀 ‘쉽게 가려는(easy going)’ 공무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경제부처 실무 과장들이 정권의 향배에 신경 쓰지 않고 소신껏 일을 계속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공직 사회가 예전보다는 많이 성숙해졌다는 느낌이다. 관료들이 이처럼 ‘정치’에 휩쓸리지 않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꾸준히 이어나가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풍경이 “지금의 정책 방향을 쉽게 뒤집을 수 없도록 ‘대못질’을 해놓고 나가겠다”는 청와대의 오기에서 비롯됐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청와대는 최근까지도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과 지시 사항에 맞춰 각 부처가 법령 정비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수시로 체크하며 ‘시어머니’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청와대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친노 세력을 대표할 후보를 본선에 진출시키지 못해서라는 해석도 나온다. 온통 선거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지난 정권 때보다 한결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이처럼 대부분이 동요 없이 그동안 하던 일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본업은 제쳐두고 시민단체가 여는 ‘토론회’를 쫓아다니느라 바쁜 공무원들도 있다. 지난 13일 시민단체인 행정개혁시민연합이 주관한 ‘차기 정부 조직개편 경제·산업 부문 토론회’에는 몇몇 부처에서 내보낸 공무원들이 방청석을 가득 채우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이들은 자기 부처에 불리한 토론자들의 발언이 나올라치면 곧바로 손을 들어 반박하는 등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여론전에 밀려 다음 정부의 조직 개편 과정에서 혹시나 자기 부처가 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해서다.행정개혁시민연합의 한 관계자는 “이런 토론회에 ‘방청객’을 가장 많이 보내는 부처부터 메스를 대면 될 것”이라며 “방청객을 많이 내보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업무 부담이 덜하다는 얘기가 아니겠느냐”고 ‘농반 진반’으로 말하기도 했다.시간을 쪼개 책을 펴낸 ‘학구파’ 관료들도 있어 눈길을 끈다. 이철환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은 최근 1970~80년대의 추억들을 모은 ‘네 가지 빛깔의 7080이야기’를 내놨다. 책은 10월 유신과 5·18 민주화운동 등 당시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블랙’에, 전태일 분신 사건과 KAL기 폭파 성수대교 붕괴사건 등 사회 분야 사건들을 ‘그레이’에 빗댄다. 이어 경제 성장과 산업화 과정은 ‘그린(경제)’으로,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는 ‘블루(문화)’로 풀어낸다.이 원장은 에세이집 ‘과천종합청사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1992년 출간)’ 등 8권의 저서를 갖고 있는 ‘글쟁이 공무원’이다. 그는 “7080세대는 오늘의 한국 경제를 있게 한 주인공들로, 이들의 열정과 고뇌를 자라는 세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또 윤수영 재경부 지역특화발전특구기획단장은 풍부한 역사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경제학 개념과 지식을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한 ‘세속 경제학’을 출간했다. 글로벌 경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알아두면 좋을 상식들을 사례를 통해 재미있게 풀어낸 점이 눈길을 끈다. 차기현·한국경제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