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울상 짓자 정부가 엔화 상승에 견제구…자동차·기계 특히 타격

일본 내각부는 올 3분기(7~9월) 일본 경제의 실질 경제성장률이 연율로 2.6%에 달했다고 지난 13일 발표했다. 2%에 못 미칠 것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크게 웃돈 것이다. 지난 2002년 2월부터 시작된 전후 최장기 경기 회복 국면이 지속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그러나 이날 오타 히로코 일본 경제재정상은 기자회견에서 “일본 경제 전망에 대해 무조건 낙관하고 있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경기 둔화와 고유가 엔고 등 악재 돌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 것이다. 그는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에서 야기된 글로벌 금융시장 혼란을 비롯해 여러 리스크가 일본 경제 주변에 자리 잡고 있다”며 “특히 서브프라임 문제가 미국 경제와 소비 지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일본 경제에 어떤 영향을 줄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일본 경제가 해외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로 인한 미국 경제의 성장 둔화, 치솟는 국제 유가, 엔화 가치 급등 등은 모두 일본 경제의 뒷발을 잡는 요인들이다. 자칫 이들 악재에 휘말릴 경우 일본 경제는 회복세가 꺾여 다시 침체에 잠길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들이 해외 경제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다. 최근 해외 악재로 가장 전전긍긍하고 있는 곳은 일본의 수출 기업들이다.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엔저 순풍으로 수출이 크게 늘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최근 엔화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엔고 역풍을 맞고 있다.지난 12일 도쿄 외환 시장에서 엔화 가치가 급등해 1년 6개월 만에 달러당 110엔대로 진입하자 일본의 자동차 기계 부품·소재 등 수출 기업들은 바짝 긴장했다. 대부분의 수출 기업들이 경영 계획을 짜면서 예상한 올해 평균 환율은 달러당 110~115엔. 그러나 이날 환율은 예상 환율의 ‘마지노선’에 육박했다.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10엔 밑으로 떨어지면(엔화 가치 상승) 수출이 아무리 잘돼도 엔화 환산 이익은 당초 계획보다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가격 경쟁력 자체가 떨어져 수출이 위축될 수도 있다.‘엔고’로 타격이 가장 큰 곳은 자동차와 부품·소재 기업이다. 다른 업종에 비해 수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경우 일본에서 생산해 해외로 수출하는 것이 2001년 416만 대를 저점으로 5년 연속 증가했다. 지난해엔 596만 대까지 팽창했다. 게다가 자동차 내수가 감소하는 추세여서 일본에서 만든 자동차 중 수출되는 비중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그 비중은 지난해 52%로 19년 만에 50%를 돌파한 데 이어 올 1~9월 중엔 55.7%를 기록했다.일본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해외에 파는 비율이 높을수록 엔고로 인한 수익성 악화 리스크에 많이 노출돼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도요타자동차 등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엔고 추이를 봐가며 일본 국내보다는 해외 생산 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 중이다.소재 관련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 기업도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의 수요 증가로 수출 비중이 크게 높아진 상태다. 일본의 석유화학 제품의 지난해 수출액은 1조5000억 엔으로 5년 연속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2001년에 비해선 수출액이 약 2.2배로 늘어났다. 수출 비중은 올 1~9월 중 31.6%에 달했다. 철강 수출액도 지난해 처음으로 300억 달러를 넘어서 전체 매출 중 32.8%를 차지했다. 환율 변동 리스크가 그만큼 커진 셈이다.물론 적지 않은 기업들은 올해 수출에 따른 환전 수요 만큼은 선물환 거래 등을 통해 환리스크를 회피한 상태다. 마쓰시타전기 관계자는 “금년 평균 환율을 달러당 110엔으로 비교적 보수적으로 잡은 상태”라며 “게다가 10~12월 중 환전 수요에 대해선 달러당 116엔의 선물환 계약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엔고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러나 엔고 경향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에 대해선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호소이 스스무 이즈스자동차 사장은 “엔화 가치가 달러당 1엔 오를 때마다 영업이익은 4억 엔(약 33억 원) 정도 줄어드는 타격이 있다”며 “달러당 110엔 정도까지는 견디겠지만 그 이상 올라가면 어려움이 클 것 같다”고 말했다. 엔고로 일본 기업들이 코너에 몰리자 점잖기로 유명한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가 나섰다. 후쿠다 총리는 지난 13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를 갖고 “엔화 가치가 너무 빠르게 오르고 있다”며 “엔화 투기 세력들은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엔화 평가절상은 분명 문제”라며 “환율이 어떤 식으로든 급작스레 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후쿠다 총리는 “원론적으로 일본이 점진적인 엔화 가치 상승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엔화 가치 상승을 거부해선 안 된다”고 ‘장기적 관점’이란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어 “투기적인 움직임은 단속될 필요가 있다”며 “조심하면 그것(시장 개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정부가 시장에 개입한다면 그 책임은 투기 세력들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 통화 당국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지로 해석된다.후쿠다 총리의 경고성 멘트는 지난 12일 마치무라 노부타카 관방장관이 엔화 상승을 용인하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해 엔화 가치를 급등시켰던 것을 진정시키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일본은행(BOJ)은 후쿠다 총리의 인터뷰가 보도된 바로 그날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현행 연 0.50%인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일본은행은 비정상적인 초저금리를 바로잡기 위해 금리 인상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그러나 일본은행은 △일본 경제가 디플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재부각된 데다 △엔화가 강세를 나타내는 등 금리를 인상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못해 금리를 동결했다고 발표했다. 저금리 유지를 통해 위태위태한 경기 회복세를 그나마 지탱해 보려는 고육책으로 볼 수 있다.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4분기(10~12월)부터 미국 경기 둔화와 엔고 등의 악영향이 일본 경제에 가시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최근 “미국의 4분기 경제 성장세가 둔화될 것”이라며 “그 같은 추세는 내년 봄까지 지속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버냉키 의장의 말대로라면 일본 경제도 4분기는 물론 내년 1분기에 성장률이 둔화될 가능성이 높다.현재까지는 중국 중동 등 신흥시장에 대한 수출 호조가 미국 수출 부진을 상쇄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엔화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수출 기업들의 수익성을 급속히 갉아먹고 있다. 특히 신용 위기 문제가 장기화되면서 미국 소비가 본격적으로 위축되면 일본 수출 기업은 타격을 피할 수 없다. 수출이 줄면 일본 기업들의 투자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다이이치생명연구소의 시마미네 요시키요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서브프라임 문제로 일본 기업의 크리스마스 매출도 걱정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일본 기업의 실적 호조에도 불구하고 일본 근로자들의 임금이나 고용 사정은 크게 개선되지 않아 내수 소비도 부진한 상태다.이에 따라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올해 경제 성장 전망치를 잇달아 하향 조정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2007 회계 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 일본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1%에서 1.8%로 내렸다. 오타 경제재정상도 최근 기자들에게 “일본이 2007 회계연도 실질 경제 성장 목표 2.1%를 달성하지 못할 수 있다”고 밝혔다.지난해 12월 경제재정성은 2007 회계연도 경제 전망치로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2%, 명목 GDP 증가율 2.2%를 내세운 바 있다. 그러나 지난 8월 명목과 실질 GDP 증가율을 모두 2.1%로 수정했었다. 해외 악재에 발목 잡힌 일본 경제가 전후 최장기 회복 국면을 과연 마감할지 주목된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