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린치 3분기 22억 달러 손실… 고유가·달러 약세 겹치며 골칫거리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파문이 스멀스멀 다시 기어 나오고 있다. 사라진 듯싶다가도 다시 기어 나오는 모습이 없애려고 해도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바퀴벌레 집단 같다.이 파문으로 스탠리 오닐 전 메릴린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와 찰스 프린스 씨티그룹 회장 겸 CEO가 단숨에 날아갔다. 제임스 케인 베어스턴스 회장도 자리가 위태위태한 상태다. 그런가 하면 서브프라임 파문에서 비켜나 있던 것으로 여겨지던 모건스탠리조차 큰 폭의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관측도 대두되고 있다. 지난 3분기 결산으로 한풀 꺾였던 것으로 여겨지던 서브프라임 파문이 월가 금융회사들을 다시 옥죄고 있는 형국이다.이 같은 파문의 확산은 불확실성을 다시 증가시키고 있다. 금융회사들이 얼마나 피해를 볼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은 증시에도 악재다. 또 지긋지긋한 신용 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경제 전체에도 나쁜 영향을 주기는 마찬가지다.그렇지만 전과는 다르다. 일단 어느 정도 내성이 길러졌다. 두 차례에 걸친 금리 인하로 신용 위기의 파문도 진정 추세다. 비록 금융회사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더라도 그 영향은 제한적인 가능성이 높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브프라임 파문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어 글로벌 경제와 글로벌 증시는 한동안 그 파장에 진통을 거듭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메릴린치는 세계 최대 증권사다. 이런 메릴린치도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지난 3분기 중 22억4000만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메릴린치 93년 역사상 최대다. 서브프라임 관련 채권의 손실로 무려 79억 달러를 상각한 타격이 컸다.예상을 뛰어넘는 이런 손실은 결국 오닐 회장의 퇴진으로 이어졌다. 오닐 회장은 이사회에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와코비아은행과 합병 논의를 진행한 점이 드러나 ‘괘씸죄’까지 추가됐다. 채권 담당 대표를 해임하는 등 책임을 떠넘기며 발버둥쳤던 오닐 회장은 결국 지난 10월 30일 두 손을 들고 말았다.오닐 회장은 월가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흑인으론 처음으로 월가 금융회사 CEO에 오른 사실만으로도 경이롭다. 오닐은 남부 앨라배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노예일 정도로 ‘전형적인’ 흑인 가정이다. 가난 때문에 10대때 GM 생산 공장에서 일했던 오닐이다. GM 사내 대학을 거쳐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난 1986년부터 메릴린치에 자리를 틀었다. 이어 승승장구한 그는 ‘메릴린치의 희망’으로 불리며 지난 2002년 12월 CEO 자리에 올랐다. 작년 한햇동안 메릴린치 사상 최대의 흑자를 안겨주며 그 자신도 4800만 달러의 연봉을 챙긴 오닐이었지만 서브프라임 파문이란 태풍 앞엔 속수무책이었다.서브프라임 파문은 오닐만을 희생자로 요구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 은행인 씨티그룹의 찰스 프린스 회장도 결국 나가떨어졌다. 씨티그룹은 3분기 순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57%나 감소해 충격을 줬다. 프린스 회장은 그러나 “3분기로 서브프라임 관련 손실이 모두 반영됐으며 4분기부터는 정상적인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며 ‘불확실성의 제거’에 방점을 뒀다.이런 자신감은 씨티그룹의 최대 주주인 왈리드 빈 탈랄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의 신임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도 순간뿐. 이사회의 점검 결과 프린스의 장담과는 달리 4분기에 80억~110억 달러의 추가 손실을 반영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프린스는 파리 목숨이 됐다.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손실에 맞춰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투자자들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선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게 이사회의 판단이었고 결국 천하의 프린스도 두 손을 들고 나가떨어져야만 했다.이처럼 월가의 두 거물이 날아간 건 당장 엄청난 손실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손실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 끝난 것처럼 보였던 서브프라임 파문에서 회사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실제 그렇다. 씨티그룹은 550억 달러의 서브프라임 관련 자산 중 앞으로 최대 110억 달러를 상각해야 한다는 자체 판단이다. 일부에서는 상각 규모가 138억 달러에 달할 것이란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550억 달러 전체를 다 날려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씨티그룹만이 아니다. 서브프라임 파문에서 비켜나 있던 것으로 여겨지던 다름 금융회사도 마찬가지다. 미국 2위 증권사인 모건스탠리도 4분기에 60억 달러의 부실 자산을 상각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메릴린치도 30억 달러는 더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그런가 하면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도 4분기에는 대규모 자산 상각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측된다.이처럼 금융회사의 손실이 끝없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로 지적된다. 우선은 금융회사들의 부실 자산 숨기기다. 당초 서브프라임 파문이 터졌을 때 시장 참가자들은 월가의 금융회사들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었다. 상당한 손실이 있을 법한데 ‘괜찮다’고 버티고 있는 탓이었다. 증권거래위원회(SEC) 등이 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으나 복잡한 파생 상품의 회계 처리를 파헤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금융회사들은 이들 중 일부를 3분기 결산 때 반영하고 나머지를 순차 반영할 요량이었다. 주택 경기가 살아나 부실 자산이 우량 자산이 될 것이란 기대도 상당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기대’에 그치고 말았다. 헤지 펀드와 파생 상품을 이용해 여기저기 부실을 숨기고 과소 평가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엄청나다 보니 부실 자산을 숨기기에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주택 경기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것도 주된 이유다. 서브프라임 관련 자산은 주택 경기와 비례해 부실 정도가 결정되도록 돼 있다. 주택 경기가 나빠져 부실화되는 모기지가 많아지면 관련 채권의 부실화도 심화된다. 아무리 3분기 결산 때 손실을 모두 반영했다고 하더라도 추가로 부실화되는 채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지난 10월 초 다우지수를 사상 최고로 이끌었던 ‘불확실성의 제거’라는 재료는 이제 다시 ‘불확실성의 재현’이란 악재로 나타나고 있다.되살아나는 서브프라임 악령은 미국 증시는 물론 글로벌 증시에도 악재다. 다른 무엇보다 신용 불안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대형 금융회사들에 대한 불신감은 ‘아직 믿을게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게 마련이다. 당연히 해소 조짐을 보이는 신용 경색 현상도 해소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다.그렇지만 그 자체로만 보면 파괴력은 이전보다 훨씬 떨어진다. 우선은 이미 예상된 악재다. 주택 경기가 악화되면 금융회사들의 피해도 커질 것이란 건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비록 ‘부실 자산 숨기기’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지만 금융회사들이 발표한 부실만이 전부라고 믿었던 순진한 투자자는 없다.그 파장이 금융회사에 제한적이라는 점도 다르다. 금융회사의 피해가 커지는 것은 물론 좋지 않다. 그렇지만 이미 뉴욕 증시에서 금융주는 무거운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주가 더 떨어진다 하더라도 큰 타격은 아니다.더욱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두 번에 걸친 금리 인하로 경제에 상당한 숨통이 트인 상태다. 3분기 경제성장률이 3.9%로 높게 나온 것을 비롯해 최근 나오는 3분기 경제지표는 괜찮은 편이다. 소비 위축이 염려되긴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서브프라임 파문이 금융회사에 미치는 영향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란 게 월가의 일반적인 전망이다.그런데 문제는 ‘불행은 한꺼번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서브프라임 파문만 재현되면 영향은 제한적일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주변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당장 고유가와 달러화 약세가 문제다. 배럴당 100달러를 넘보는 고유가는 경제 전체에 주름살을 드리우고 있다. 사상 최저치 행진 중인 달러화 약세도 뉴욕 증시와 미국 경제에 대한 믿음을 깨뜨리고 있다. 이런 상황과 어우러지다 보니 서브프라임의 지속적인 파문도 승수작용을 일으키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결국 거머리처럼 질긴 서브프라임 파문이 악재로서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 여부는 고유가와 달러화 약세 등 다른 변수의 파급력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