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의 기운을 느끼고 문득 창밖을 바라본다.어느새 짧은 하루해는 서산에 걸리고, 여느 때처럼 삼삼오오 재촉하는 발걸음들을 본다. 그리고 오늘도 저들은 어디론가 향해 갈 것이다.찬바람을 피해 동료들과 한 잔 술을 기울이는 이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러 가는 이도 있을 테고 중요한 비즈니스 모임에 바쁜 이들도 있을 테다. 누군가의 아빠, 엄마, 남편, 아내, 아들, 딸들로 오늘도 부지런히 하루를 보낸 이들의 어깨가 경쾌하게 느껴질 때쯤, 새삼 우리 가족을 위해 너무나도 열심히 사셨던 아버지 생각이 마음의 파도를 일으킨다.아버지는 동시대를 살아온 엄격하고 절대적인 존재인 가부장적 아버지와 달리 상당히 가정적이고 진보적인 분이셨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실 때면 언제나 가족들을 위해 모든 시간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특히, 가족들을 위해 요리하는 걸 즐기셨던 아버지의 요리 솜씨는 어머니의 손맛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수준급이셨다.유난히 정이 많아 고향을 떠나 홀로 자취생활을 하는 동료 은행원들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셨다. 찬이 없는 식사 자리일지라도 꼭 초대해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이 먹는 일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여기시는 분이셨다.지금도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추억 한 조각이 있다.어린 시절, 주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다니는 일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아버지와의 낚시 동행은 나에겐 늘 신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기다리는 법과 기다림을 즐기는 법, 그리고 조용히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법, 고기를 낚기 위해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 동안 지난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 할 일을 구상하고 설계하는 법….이 모든 것을 아버지는 낚시를 통해 나에게 새겨주셨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 낚시를 하듯 사무실에 조용히 앉아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할 때면 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한다.언제나 생각이 열려 있고 남들보다 한발 앞서가는 사고를 하셨던 아버지는 은행원으로서의 자기 계발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서재의 책장엔 빼곡히 들어찬 책들로 늘 특유의 책 향기가 그득했다.어려서부터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본 영향인지 지금도 나는 자기 계발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긴다. 외국계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로서 꾸준한 외국어 교육은 물론이고 다양한 책을 통해 성공적인 경영 아이디어를 얻고자 노력한다.또, 각종 모임을 통해 성공한 이들의 노하우와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처럼 나 자신을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갈고닦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밑바탕엔 아버지가 있었다.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시고, 유연한 사고로 남들보다 한발 앞서 나가시던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진 아버지는 영영 일어나지 못하셨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모든 것을 엉클어 놓았다.내 나이 열아홉 살에 어린 동생 셋과 홀로 된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됐다. 현실을 냉정히 인정하고 나니 책임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나는 졸업 후 곧바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고 가족을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아버지의 존재감과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누구보다 힘들고 버거웠던 그때 그 시절….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시간들이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찬바람이 스산한 가을 오후. 오늘따라 활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던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글 / 심상돈1957년 출생. 79년 인하대 전자공학과, 2005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83년 보청기 업체인 동산실업의 대표에 취임했으며, 96년부터 외국계 보청기 회사인 스타키코리아와 스타키보청기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 본사 아태지역 부사장이며, 장애인부모회 후원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