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격차 줄자 디자인으로 승부…IT와 명품 짝짓기 열풍 거세

델인터내셔널은 업무용이라는 자사 노트북 PC의 딱딱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검정과 회색으로 일관됐던 노트북 PC에 화이트, 블랙, 레드, 블루, 옐로 등 8가지 색상 제품을 추가했다.삼성전자는 데스크톱 PC, 노트북 PC, 모니터, 프린터에 이르기까지 고광택 검정색을 적용해 일관성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모니터, 본체, 프린터 등 PC 시스템은 단품이 아닌 여러 제품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사 제품으로 시스템을 구축했을 때의 심미성을 강조했다.정보기술(IT) 제품 케이스 전문 업체 케이스로직은 2000년대 초 전체 제품 90%가 검정색이었다. 이 업체는 향후 색상과 디자인이 소비자들 구매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 아래 지속적으로 다양한 색상 제품을 선보여 현재는 전체 제품 중 70%가 검정색이 아닌 다른 색상으로 발매된다.이처럼 최근 IT 제품들은 기존의 딱딱하고 무거워 보이는 검정이나 무난한 은색 등 무채색을 버리고 총천연색으로 변신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기술 발달 속도가 빠르다 보니 웬만한 기술 진화는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최근 색상을 강조한 제품이 나오는 것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얻고, 소비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그동안 IT 제품의 발전 속도는 놀라웠다. 컴퓨터가 탄생한 뒤 반세기, IT 업계는 숨도 안 쉬고 달려오는 동안 업계를 이끌어 온 중요한 트렌드는 ‘기술(Technology)’이었다. 기술에 맞춰 제품이 기획되고 디자인됐다.그러나 최근 들어 IT 제품은 기술보다 ‘디자인’에 눈을 돌리고 있다. 공부에만 매달리던 모범생이 ‘패션’에 눈을 뜬 것이다. 업계는 향후 IT 부문에 디자인과 유행을 포함한 ‘패션’이 중요한 성장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일부 업체들은 기능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숨기고 디자인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기술력은 그 차이가 확연하지만, 디자인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에 IT 업체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명품 업체에 손을 벌리고 있다. 이런 명품 마케팅은 IT 제품 중 다른 사람에게 자주 노출되는 모바일 제품, 노트북 PC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다.삼성전자가 덴마크 IT 명품 업체 뱅앤올룹슨(Bang & Olufsen)과 함께 휴대전화를 내놓은 데 이어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와 손잡고 ‘아르마니 폰’을 내놨고, LG전자는 프라다와 함께 ‘프라다 폰’을 출시했다. 이들 제품은 기능상 일반 휴대전화와 큰 차이점은 없지만 보통 휴대전화 두 배 이상 가격에 팔리고 있다.아수스는 이탈리아 스포츠카 업체 람보르기니(Lamborghini)의 디자인을 녹여낸 노트북 PC를 내놨으며, HP도 메르세데스 벤츠 마이바흐 콘셉트를 적용한 노트북 PC를 준비 중이다. 대만 PC 업체 에이서도 스포츠카 페라리 디자인을 적용한 노트북 PC를 지난해 선보인 바 있다.이들 제품은 대량생산을 통해 수익을 추구한다는 기본적인 IT 업체의 룰과 다른 한정 생산을 통해 가치를 높이는 명품 생산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하지만 명품 IT 제품들이 제조사에 큰 수익을 올려주지는 못하고 있다. 아수스 관계자는 “람보르기니 노트북 PC가 전체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다른 제품 판매량과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IT 제품의 패션화는 주 수요자인 젊은이들의 구매 행태를 보면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애플 아이팟(iPOD)은 한국에서 온라인 음악 구매 서비스인 ‘아이튠스(iTunes)’를 지원받을 수 없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서비스를 포기하고라도 디자인과 유행을 따르겠다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최근 출시된 아이팟터치(iPOD touch)는 한글 입력이 안 되는 기능상 제약이 있어도 매장에 나오자마자 품절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레인콤이 최근 출시한 MP3플레이어 ‘엠(M)플레이어’는 단순한 MP3 파일 재생 기능 밖에 제공하지 않지만 미키마우스 형태의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다. 레인콤 관계자에 따르면 “엠플레이어 사용자를 분석한 결과 여성 고객 비중이 다른 제품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분석이다. 디자인을 중시하는 여성들이 다른 다기능 MP3 플레이어보다 엠플레이어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엠플레이어는 출시 이후 가격 비교 사이트 등에서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레인콤에서는 새로운 잠재 시장을 확인했다는 내부 평가가 있을 정도다.시장 변화에 따라 기술 주도 업체가 디자인 외주를 주던 관행에서 벗어나 디자인 전문 업체가 중심이 돼 외주 제작을 통해 제품을 개발하는 방식이 눈에 띈다.그동안 삼성전자, 레인콤 등의 제품 디자인을 맡아 왔던 이노디자인(대표 김영세)은 자회사 이노맨(대표 이순)을 통해 디지털 브랜드 ‘이노’를 선보이고 10월부터 자체 생산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제품은 MP3 플레이어, 블루투스 헤드셋, 무선 전화기 등이지만 향후 제품군을 더 확대할 계획이다.김영세 대표는 다른 IT 업체들이 시장을 분석하고, 이에 맞는 전략을 짜서 제품을 내놓는 것과 달리 디자이너 아이디어에 따라 제품을 개발, 출시한다는 계획이다. 즉, 아이디어가 없으면 제품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아이디어에 따라 영역과 기능을 고려해 제품을 출시한다는 독특한 콘셉트를 갖고 있다.명품 업체들과 협력하는 것 외에도 IT 업체들은 디자인과 관련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고정관념을 깨는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고 있다.삼성전자는 지난 8월 고광택 블랙 색상을 적용한 초슬림 모노 레이저 프린터 ‘스완’과 레이저 복합기 ‘로간’을 출시했다. 로간과 스완은 사무용이라는 프린터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1년 동안 제품 디자인과 개발을 병행해 탄생시킨 제품이다. 용지 거치대를 보이지 않게 하고 소프트터치 버튼을 적용해 딱딱한 사무용 기기가 아니라 세련된 인테리어 소품처럼 느껴진다.노트북 PC와 휴대전화는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케이스를 버리고 가죽과 티타늄, 알루미늄 등으로 만들면서 외관을 다양화하고 있다. 그동안은 초소형 IT 기기는 안정성이나 발열 등 기술적 요소를 우선했지만, 최근에는 심미성을 기준으로 재질과 디자인을 고르고 있다.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디자인에 무게를 더 싣고 있다. 디스플레이 전문 업체 비티씨정보통신은 직사각형 모니터 좌우에 날개를 형상화한 디자인을 적용해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이 업체 관계자는 “요즘 소비자들은 가격 못지않게 디자인을 중요시하고 있다. 가격이 중소기업의 경쟁력이었다면, 이제는 디자인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전망했다.IT 제품 자체뿐만 아니라 액세서리에도 대담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IT 기기 액세서리 전문 업체인 벨킨의 인터넷 공유기는 대형 LED를 내장해 현재 제품이 잘 동작하는지, 어떤 상태인지 알려준다. 경쟁사 제품과 성능에서 큰 차이가 없는 제품 특성을 벗어 던지고 디자인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경우다.다른 액세서리 업체 케이스로직도 밋밋한 디자인을 탈피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타투’ 문양을 적용한 가방을 생산하고 있다. 이달 국내 시장조사차 방한한 케이스로직 대표 토머스 R 샌들러 대표는 “앞으로 IT 업계는 신발이나 옷처럼 디자인에 따라 구매가 결정되는 추세가 강화될 것”이라며 “교체 주기가 급속히 빨라져 유행을 따르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인기를 끌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케이스로직은 자사 액세서리의 기능과 디자인의 특허 등록을 추진 중이다.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IT 업체들은 기능, 기술에만 집중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디자인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이형근·디지털타임스 기자 brupr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