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못 박힌 단단한 굳은살과 검게 그을리다 못해 잿빛으로 타버린 얼굴.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촌부이시다. 이제는 좀 쉬시라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마 오늘도 지난 40여 년을 한결같이 그러하신 것처럼, 첫닭이 울기도 전에 서걱거리는 툇마루에서 신발을 고쳐 신으며, “오늘은 선선해서 일하기 좋겠네”라며 어두운 새벽 저편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셨을 것이다.만석꾼이셨던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만석꾼의 막내아들’이란 부질없는 화려한 과거의 타이틀과 얼굴 한 번 본적이 없었던 두 명의 새어머니, 그리고 역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었던 일곱 명의 동생만을 덩그러니 남기고 작은 전답하나 없이 세상을 먼저 떠나셨다.숨이 막힐 듯한 강한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해 여름, 내가 철이 들 만할 때라고 생각하셨던지 평소 무뚝뚝했던 아버지는 막걸리 한 사발을 통째로 들이켜시곤 함께 논일을 거들던 나에게 당신이 보내셨던 험난한 세월을 말씀해 주셨다.그냥 어머니와 주위 분들을 통해 간단히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리 직접 당신의 입에서 나온 고단한 삶의 기록은 그때까지만 해도 대형 과수원과 많은 논밭을 가진, 동네에서 가장 큰 방앗간 집 아들로 나태하게 생활했던 나 자신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었던 유년시절에서 갑자기 몰락한 집안 삼형제 중 막내였지만 생전의 할아버지를 그대로 빼어 박은 듯 닮았던 두 형님들의 계속된 탕진으로 집안을 먹여 살리는 살벌한 책임을 지고 생활고의 최전선에서 홀로 몸부림쳐야만 했던 시간들…. 새롭게 집으로 들어온 낯선 작은 어머니들, 처음 보는 동생들과의 어색한 동거….그전까지 할아버지가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돌아가시기 전 많은 재산을 탕진했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처럼 적지 않은 유산을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남겨주었고, 남은 두 삼촌이 여러 가지 이유로 다 날려버렸고, 싫은 내색 없이 집안 전체를 위해 맨손으로 묵묵히 일하셨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특히 감싸주고 안아줘야 할 일가친척들의 모진 냉대를 겪으며 작은 텃밭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사들인 지금의 전답을 보면 뿌듯한 마음과 함께 당신의 피를 뿌려놓은 듯한 세월의 아픔을 느낀다는 말씀에 가슴이 저몄다.이런 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고 꽤 긴 침묵 끝에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아버지, 저 정말 큰 부자가 될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논밭을 모두 찾아서 아버지께 드릴 게요.”“허허, 지금도 논밭이 꽤 많은데, 어떻게 큰 부자가 될 건데?”“아주 열심히 일해서요.”“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될 것 같으면 농부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을 건데? 열심히 일하는 것은 사람이 태어나면 당연히 해야 할 기본이고, 그것 말고 하늘에서 내려준 ‘자신에게 던져진 몫’을 해야 한다.”“그 몫이란 게 뭔가요?”“사람마다 다르지.”“그럼 아버지의 몫은 무엇인가요?”“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눠주는 거지,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내 마음이 필요한 사람…. 하나를 베풀면 열이 돌아오는 게 이 세상 이치라고 아버지는 생각한다.”그제야 당신이 어려울 때 그토록 냉담하던 일가친척들이 당신의 피땀으로 사들인 임야를 선산으로 달라고 했을 때 선뜻 내어주시고, 그 모진 고생의 원인을 제공했던 당사자 격인 당신의 두 형님들에게도 아무 말 없이 적지 않은 전답을 내어주시던 그 모습이 이해가 됐다.돌이켜보면 지금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손해를 보아도 조금은 넉넉하고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원동력(집사람은 정말 싫어하지만)은 바로 하늘에서 내려준 ‘그 몫’을 나눔이라 생각하는 아버지처럼, 나도 모르게 그 나눔을 나 자신의 몫으로 인정했기 때문인 것 같다.글 / 김외기67년 경남 창녕 출생, 15년간 솔리드 백지영 김건모 김종국 윤도현 등의 음반 제작 사업을 했으며 디지탈퍼스트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음원제작자협회 이사이며, 결혼 정보 기업 웨디안 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