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 가문은 시골의 가난한 선비 집안이었다. 어려운 집안 환경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힘들게 학업을 이어가고 대학 입학 허가를 받고도 입학금이 없어 결국 공부를 포기하셔야 했다고 한다.그와 반대로 어머니는 조선시대 마지막 전의(典醫) 집안이라 많은 머슴과 큰집에서 큰 어려움 없이 커 오셨다고 한다. 내가 어릴 적에 옛날 임금님이 내려주신 금침이라며 용과 공작이 그려져 있는 비단주머니에 꽂혀 있는 커다란 금침을 보여주시면서 “너도 커서 외증조부처럼 훌륭한 한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항상 말씀하시곤 했다.이렇게 서로 환경이 다른 두 분이 어떻게 결혼까지 하시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그 결정적인 이유는 외할아버지의 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돈이 풍부한 집안보다는 바른 심성을 가진 선비 집안을 택해 어머니를 시집보내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았을 때는 아버지의 인물 또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젊으실 적 아버지는 건강한 몸과 훌륭한 외모를 가지고 계셨다. 선글라스를 끼고 시내에 나가면 모두 쳐다볼 정도로 훤칠한 외모를 소유하고 계셨으며 트럼펫과 기타 연주를 잘하시고 목소리 또한 점잖으면서 부드러워 단연 누가 보더라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호감 가는 스타일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외할아버지의 관심을 끈 이유는 예의 바르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었다고 어머니는 회상하시곤 했다.내가 어릴 적 여덟 살 될 무렵이었다. 모든 사물에 관심이 많아 장난감, 집에 있던 라디오, 전축(지금의 오디오) 할 것 없이 모두 내 손으로 뜯어보고 조립하지 않으면 궁금해 미칠 정도로 기계와 가전제품을 좋아했던 나는 어느 날 아버지의 시계를 몰래 가져와 분해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분해하던 것처럼 분해한 순서대로 열을 맞추어 옆에 정리해 가면서 거의 분해가 끝나갈 무렵 아버지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몰래 아버지 손목시계를 가져와 분해한 나도 놀랐지만 아버지도 아끼던 손목시계가 산산이 분해돼 있는 것을 보고 많이 놀라시는 표정이었다.그런데도 차분히 “너 이거 다시 조립할 수 있겠니?”라고 물어보셨고 난 “예!”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조용히 나가셨고 많이 놀랐던 나는 분해했던 순서를 거꾸로 밟아 다시 재조립에 들어가 원래의 모습대로 완성시켜 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 시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가고 있었고 아버지 또한 안심하시는 표정이었다. 그러시면서 남의 물건을 만질 때는 꼭 허가를 받고 하라고 따끔하게 말씀하시면서도 내가 방을 나서자 마냥 허허허 웃으셨다.아버지는 항상 내가 한의사나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난 예능적인 소질과 기계에 대한 호기심을 버릴 수 없었고 아버지와 생각이 많이 달라 항상 혼이 나곤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버지께서는 항상 사람의 도리와 가문의 중요성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말씀하셨고 당시 어린 나로서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번만 말씀하셔도 다 알아 듣는데 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자꾸 말씀하시나. 그게 내 불만이었다.지금 두 딸의 아버지가 된 나는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나도 모르게 엄하게 다스리는 내 모습에서 과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난 한상 두 딸에게 “공부를 못하는 것은 용서하지만 예의 없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은 용서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가끔 집사람은 “학생이 공부가 제일 중요하지!”라고 말하곤 하지만 사람의 가치는 사람답게 사는데 있다고 본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에게 “사업을 머리로 하지 말고 가슴으로 하라”고 말씀하신다. “좋은 제품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 차를 한번 만들어 봐라.”난 지금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말뜻을 이해하기엔 부족함이 많은 듯하다. 글 / 이정용 레오존 대표1965년 출생. 호주 로열 멜버른기술대(RMIT)에서 자동차 디자인 석사, 호주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대학(UNSW)에서 공업 디자인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 후 평화자동차 연구실장과 지오이브이(GEOEV) 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기차 개발업체인 레오존 대표이사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