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고령자 배려 의사 거듭 확인…재계는 개혁후퇴 조짐 걱정

“따뜻한 개혁을 추진하겠습니다.”후쿠다 야스오 일본 신임 총리(71)는 지난 1일 국회에서 가진 첫 소신 표명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6년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흔들림 없는 개혁’만 강조했던 것과는 온도 차가 느껴진다.후쿠다 총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규제 완화와 민영화로 대변되는 시장 중시 개혁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그 개혁에 ‘따뜻한’이란 수식어를 달았다. 그간의 개혁으로 유발된 도시·지방 간, 계층 간 격차 확대를 좁히는 데도 신경을 쓰겠다는 의미다. 지난 7·29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한 것도 개혁으로 인한 ‘격차’ 문제를 방치했기 때문이란 반성에서다.그러나 후쿠다 신임 총리의 ‘따뜻한 개혁’은 결국 ‘개혁 후퇴’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도시·지방 간, 계층 간 격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지방에 대한 재정 지원과 복지 예산 확대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성장 우선’에 맞춰졌던 정책 기조가 ‘분배 중시’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일본 정가에서 “고이즈미 개혁은 이제 끝났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후쿠다 총리는 지난달 말 자민당 총재 선거 유세에서 “뭐든지 시장에 맡기는 게 최고는 아니다”고 말했다. 시장 경쟁에서 소외된 저소득층·고령자와 지방을 배려하겠다는 뜻이다. 2001년 고이즈미 전 총리가 취임 후 기치를 내걸었던 성장 위주의 시장주의 구조 개혁 노선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그는 선거 공약으로 고령자 의료비 부담을 동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관련법을 개정해 내년부터 고령자의 의료비 자기 부담이 늘어나도록 했었다. 날로 불어나는 고령자 의료비에 대한 정부 예산 지원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후쿠다 총리는 이 정책을 선거 공약으로 뒤집었다. 후쿠다 총리가 선거 공약을 지키려면 매년 약 1000억 엔(약 8000억 원)의 예산이 더 필요하다. 적자 재정 탈피가 최우선 과제인 일본 정부로선 큰 부담이다.그는 총리 취임 후 당3역 인사에서 정책조정회장에 다니가키 사다카즈 의원을 발탁했다. 다니가키 의원은 지금까지의 정부 지출 삭감 정책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이를 놓고도 정가 일각에선 ‘작은 정부’ 기조가 바뀌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와세다대 정경학부 후카가와 유키코 교수는 후쿠다 정권이 개혁 노선에서 한발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쳤다.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력은 그동안 줄여 왔던 공공 공사를 부활시킬 것이다. 고령자에 대한 의료비 부담 동결 조치는 재정 개혁의 지연을 의미한다. 농촌에 대한 배려는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FTA) 교섭을 정체시킬 것이다. 총리의 리더십이 약해지면 민영화나 규제 완화에 저항하는 관료 조직도 다시 팽창할 게 뻔하다. 현재 일본은 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는 반면 경기 회복으로 위기의식은 점차 희박해져 있다. 개혁은 후퇴 리스크에 직면해 있다.”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파벌 정치가 다시 고개를 든 것에도 우려가 크다. 아베 전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힌 직후 원래는 아소 다로 자민당 간사장이 후임 총리로 가장 유력했다. 그는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아베 총리를 이을 차기 총리로 높은 인기도를 기록했다.그러나 어느 날 밤 당내 다수 파벌 영수들이 모여 아소 의원이 아닌 후쿠다 의원을 차기 총리 후보로 결정했다. 아소 전 간사장은 아베 전 총리와 지난 1년간의 실정(失政)에 공동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 배제됐다. 주요 파벌들이 후쿠다 의원을 지지하기로 하자 나머지 군소 파벌들도 그 뒤에 줄을 섰다. 결과적으로 자민당 내 9개 파벌 중 아소 전 간사장이 회장인 아소파를 제외하고는 8개 파벌이 모두 ‘후쿠다 지지’를 선언했다.고이즈미 전 총리가 2001년 취임 후 자민당 파벌을 타파한 이후 6년 만에 파벌 정치가 되살아난 셈이다. 파벌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당선된 후쿠다 총리는 내각에 각 파벌의 보스들을 입각시켰다. 총리 자신의 리더십보다는 파벌들의 힘에 의존하려는 인상이 짙다. 이 같은 파벌의 부활은 역시 개혁 후퇴로 비쳐지고 있다.후쿠다 총리의 개혁 후퇴 조짐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앞으로 다가올 중의원 선거 때문에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자민당 내엔 지난 7·29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것은 소득 간·지방 간 격차를 무시하고 개혁만 밀어붙였던 탓이란 시각이 팽배하다. 개혁도 좋지만 선거를 위해선 저소득·고령자층과 지방 등을 배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참의원(상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장악한 야당은 “하루라도 빨리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해 정권을 교체하자”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제1야당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대표는 “자민당 정권에선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똑같다”며 중의원 해산·조기 총선을 촉구하고 있다. 후쿠다 총리로선 야당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후쿠다 총리가 맞을 야당과의 첫 번째 승부는 최대 현안인 테러대책특별조치법 연장이다. 해상자위대가 인도양에서 대테러 작전을 벌이는 미국 등 다국적 함대에 급유 지원을 계속하기 위해선 오는 11월 1일 시한인 이 법의 연장이 필수적이다.민주당의 오자와 대표는 이 법의 연장을 반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의원 해산·조기 총선을 유도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어서다. 자민당이 중의원 재의결 등 무리한 방법으로 이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한 뒤 총리 문책 결의안 등을 참의원에 제출해 정권을 흔들겠다는 의도다. 그러면 후쿠다 총리도 총선 카드를 꺼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계산이다.후쿠다 총리가 테러특조법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내년 3월에 또 하나의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일본 정부의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예산안과 부수 법안의 국회 통과다. 오자와 대표는 정부의 예산 낭비와 연금 부실 등을 집중 공격하며 예산 법안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계획이다. 예산 집행이 늦어져 정부 기능이 마비될 위기에 처하면 자민당은 총선으로 난국을 돌파할 수밖에 없다. 후쿠다 총리는 예산안 등을 통과시켜 주는 조건으로 중의원 해산·총선 시기를 민주당과 협의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오자와 대표가 응할지는 불투명하다.어쨌든 내년 상반기까지는 후쿠다 총리로서도 중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 총선은 자민당 정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후쿠다 총리로선 총선 승리에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일본 정부의 개혁 후퇴 조짐에 가장 긴장하는 건 경제계다. 재계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재계 대표인 미타라이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캐논 회장)은 후쿠다 총리 취임 이후 연일 “일본 경제의 회생을 위해선 개혁을 포기해선 안 된다”며 입만 열면 ‘개혁’을 강조한다. 개혁 후퇴에 대한 우려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게이단렌은 원래 후쿠다 총리에 기대가 컸다. 후쿠다 총리야말로 누구보다 기업 편에 서 줄 정치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후쿠다 총리는 와세다대학 졸업 후 17년간 기업에서 샐러리맨 생활을 했었다.게이단렌 회장단은 후쿠다 총리가 관방장관을 맡던 시절 ‘후쿠다 야스오 선생을 둘러싼 모임’이란 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여기엔 미타라이 회장은 물론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자동차 상담역, 이마이 다카시 신일철 명예회장, 야마구치 노부오 아사히화성 회장 등 재계 거물급만 1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믿었던 후쿠다 총리가 개혁 후퇴 조짐을 보이자 게이단렌은 더욱 당황해 하고 있다. 게이단렌 관계자는 “후쿠다 총리는 자민당 내에서도 친기업 정치인 중 한 명”이라며 “지금 자민당이 선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그는 “그렇다고 후쿠다 총리가 개선 노선을 전면 수정할 것으로 보진 않는다”며 “그는 합리적 온건주의자이기 때문에 성장 중시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지방과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를 가미하는 정책 조화를 추구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후쿠다 총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으려는 일본 재계의 모습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