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심리 회복됐어도 불안 여전… 인플레 우려로 추가금리 인하 불투명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깜짝쇼’를 선보였다. 지난 9월 18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다. FRB는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어 기준금리와 재할인율을 동시에 0.5%포인트 인하하는 ‘결단’을 내렸다. 시장은 환호했다. ‘버냉키 쇼’ 나 ‘버냉키 랠리’라는 말을 붙여가며 그동안 옹고집적인 모습을 보여 온 벤 버냉키 FRB 의장에게도 찬사를 보냈다.FRB가 시장의 기대를 뛰어 넘는 변신을 보인 것은 일단 고무적이다. 시장과 함께 호흡하는 것은 물론 시장 불안과 경기 침체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견고한 의지를 과시한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어쩌면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다.기준금리를 내리면 모든 대출 금리가 동시에 떨어진다. 일부 금융회사에만 수혜가 가는 재할인율 인하와는 다르다. 모기지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숨통이 트인다. 둔화 조짐을 보이는 소비에도 도움이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경기에 플러스 요인이 되고 경기 침체를 막을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필요조건이다. 금리 인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기준금리를 내린다고 경기 침체를 막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칫하면 달러화 약세, 유가 상승, 인플레이션 압력 등 부작용만 커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더욱이 ‘버냉키의 고집’을 꺾는 데 성공한 시장은 벌써부터 추가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있다. FRB가 다시 이를 거부할 경우 시장의 실망감은 커질지도 모른다.이렇게 보면 미국의 금리 인하는 어쩌면 또 다른 시작이다. 금리 인하 이후 화두도 여전히 경기 침체 여부로 모아진다. 펀더멘털이 추가 금리 인하 여부도, 투자 심리 회복도 결정하게 될 것이란 얘기다.◇버냉키 의장은 경제학자 출신이다. 소신이 확실하다. 이번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파문 때도 그랬다. 지난 8월 서브프라임 파문이 커지자 시장은 앨런 그린스펀 FRB 전 의장을 그리워했다. 아무리 금리 인하를 요구해도 버냉키는 요지부동이었기 때문. “금융시장 불안이 경기 하강 리스크로 작용할 경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는 말만 반복할 뿐 버냉키는 쉽사리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더욱이 “무분별한 투자자들까지 구제하는 도덕적 해이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은 금리 인하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낳게 했다.이런 버냉키가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내렸으니 말 그대로 깜짝 쇼였다. FRB가 기준금리를 내린 것은 지난 2003년 6월 이후 4년 3개월 만에 처음이다. FRB는 이와 함께 민간 은행들에 돈을 빌려줄 때 적용하는 재할인율도 5.75%에서 5.25%로 0.5%포인트 내렸다. 시장에서는 금융 위기 때마다 발 빠르게 기준금리를 내려 안정을 꾀한 그린스펀을 나타내는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이란 말에 비유한 ‘버냉키 풋(Bernanke Put)’이란 말을 사용하며 버냉키의 ‘변신’에 높은 점수를 줬다.버냉키가 이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깜짝 쇼’를 펼친 것은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이 심각한 데다 경기 침체(recession) 가능성이 간단치 않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FOMC는 회의 후 발표한 통화 정책 성명서에서 “금융시장의 혼란이 전반적인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고 앞으로 완만한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버냉키의 평소 소신대로 금융시장 불안이 경기에 영향을 주고 있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한 셈이다.이에 따라 시장의 환호는 배가 됐다. 이왕 금리를 내리는 김에 0.5%포인트 떨어뜨려 충분한 효과를 거두자는 버냉키의 의도는 적중했다. 투자 심리는 급속히 회복됐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버냉키 랠리’를 펼쳤다. 경기 후퇴에 대한 우려감도 상당히 수그러들었다.사실 0.5%포인트 금리 인하 효과는 상당하다. 모든 대출자들이 수혜를 본다. 모기지 금리 부담도 덜어진다. 잘만 하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과 주택 경기 침체를 방지할 수도 있다. 금리 부담 완화는 소비 심리 회복으로 이어진다. 소비는 미 경제성장률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소비가 살아나면 경제도 살아난다. 2분기 연속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경기 침체를 예방할 수도 있다.프루덴셜의 수석 투자 전략가인 존 프라빈 박사는 “FRB의 공격적인 조치로 시장의 우려감이 상당히 감소했다”며 “금리를 0.5%포인트 인하한 것이 0.25%포인트씩 연속 인하한 것보다 잘한 일”이라고 평가했다.◇그렇다고 낙관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용 경색이 워낙 심각해 막힌 돈줄이 풀릴지 의문이다. 모기지 금리를 약간 내린다고 이미 얼어붙은 주택 경기가 풀릴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모기지 회사가 대출을 기피하는 상황인 만큼 주택 수요가 살아날 것으로 예측하기도 힘들다. 더욱이 유가가 오르는 추세다. 휘발유 값에 민감한 미 소비자들의 행태를 감안하면 금리 인하로 소비 심리가 살아날 것으로 단언하기엔 이르다.이뿐만 아니다. 금리 인하에 따른 부작용도 상당하다. 당장은 FRB의 우려대로 인플레이션이 걱정이다. 유가마저 오르고 있어 인플레이션 압력은 언제 어느 때 해일이 돼 나타날지 모른다. 사상 최고치를 경신 중인 유가가 더 오를 경우 천하의 미국 경제라고 해도 온전히 감내할지는 의문이다. 달러가 약세를 보이면 미국 수입 물가가 올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 엔화가 오를 경우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청산될 가능성도 있다.물론 이런 부작용과 가능성을 모두 감안해 FRB는 기준금리를 내렸다. 그렇지만 기대와는 달리 경기가 침체로 빠질 조짐을 보이면 ‘버냉키 쇼’는 그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벌써부터 관심을 끌고 있는 게 추가 금리 인하 여부다.상당수 시장 참가자들은 FRB가 이왕 팔을 걷어붙인 만큼 추가 금리 인하를 망설여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고 있다. 주택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0.5%포인트 금리 인하로는 역부족인 만큼 이참에 아예 금리를 잇따라 내려 경기의 물꼬를 확실히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세계 최대 채권 펀드인 핌코의 최고투자책임자(CIO) 빌 그로스는 “현재 주택 경기가 나락을 헤매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선 1.0%포인트의 추가 인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그렇지만 FRB가 ‘매파적 속성’마저 바꾼 건 아니다. FRB는 지난 18일 FOMC가 끝난 뒤 발표한 통화 정책 성명서에서 “인플레이션 안정과 지속 가능한 성장 가능성을 촉진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인플레이션 안정을 위해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과, 성장 가능성을 촉진하기 위해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지 않은 것. 추가 금리 인하를 기대하는 시장의 요구에 일단 쐐기를 박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셈이다.따라서 추가 금리 인하를 속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결국 경제가 관건이다. 경제가 속절없이 침체로 치달을 경우 추가 금리 인하 조치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시장이 안정되고 경기의 견조함이 확인되면 추가 금리 인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경제 지표와 펀더멘털이 중요하다는 기본 속성이 변한 건 없다.이렇게 보면 시장의 관심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빠르게 펀더멘털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서브프라임 파문이 터진 지난 8월 초부터 금리를 인하한 지난 18일까지 버냉키는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린스펀과는 다르다’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장의 허를 찔러 0.5%포인트 금리를 인하함에 따라 ‘그린스펀을 닮아간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마침 그린스펀은 ‘격동의 시대’란 회고록 출간을 계기로 월가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발언도 거침이 없다. “이라크 전쟁은 석유 때문”이라든가, “부시 행정부는 정치 논리로 경제 정책을 재단하려 한다”는 등의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미 경기 침체 가능성이 50%”라고 직설적으로 경고하기도 한다. 과연 애매모호하고 비유적인 표현의 대명사인 사람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그린스펀이 이처럼 ‘속세적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함께 그의 ‘신비’도 한꺼풀 벗겨지고 있다. 다름아닌 ‘서브프라임 파문 책임론’이다. 그린스펀이 FRB 의장이던 지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금리를 연 1%로 낮게 유지함에 따라 투자 거품이 일었고, 이는 결국 지금의 금융 위기로 귀결됐다는 지적이 상당하다.그린스펀은 “인정할 수 없다”며 상황론을 펼치지만, 과정이 옳았다고 결과마저 모두 미화되는 건 결코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린스펀과의 차별화를 꾀하던 버냉키가 그린스펀과 같은 행보를 취한 것이 눈길을 끈다. 물론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전·현직 경제 대통령’의 ‘다르지만 같은 행보’도 앞으로 경제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