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현대적 재해석 추구 ㆍㆍㆍ자연주의 살림법 저서도
한창 공연 중인 뮤지컬 <해어화>는 기생학교에 들어가 혹독한 수업을 거치며 기생이 되는 네 여성의 사랑과 성공을 다룬 작품이다. 같은 내용으로 톱스타 김희선이 주인공을 맡은 드라마 <해어화>도 제작을 준비 중이다. 이 드라마는 원래 2007년에 방영할 계획이었다가 조금씩 늦춰지는 바람에 올 10월쯤 촬영에 들어가 내년 3월 방송될 예정이다. 무수한 화제의 틈바구니에는 이 드라마에 아트 디렉터로 참여한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 씨(50)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애초 ‘기생학교’라는 가제로 시작했던 초창기에 의뢰를 받았지요. 예상보다 제작이 점점 늦어지고 있어서 더 좋아요.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의 눈높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으니까요. 그동안 영화 <황진이>에서 디자이너 정구호 씨가 연출한 무채색의 절제된 분위기가 호평을 받았잖아요. <해어화>의 옷, 장신구, 그릇 등에서 이효재가 보여 줄 색깔은 아주 단아하면서 극도로 절제된 모습일 겁니다.”삼청동 거리 아담한 한옥으로 된 한복집 ‘효재’에서 옷을 만들고 천재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임동창의 아내로 살아가며 말하기 좋아하는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녀이지만, 말이며 행동은 세상에 무심한 듯 초연하기만 하다. 그녀는 TV 등 대중매체도 잘 보지 않고 숫자 기억하는 일에도 영 자신이 없고 오로지 자기 하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다.사실 그녀에게 ‘한복 디자이너’라는 수식어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한복을 포함해 천연 옷감을 사용한 거개의 옷을 다 만든다는 점에서는 패션 디자이너라고 부를 수 있다. 또 드라마 <왕의 여자>와 <영웅시대>의 의상을 거쳐 이번 <해어화>에서는 아트 디렉팅을 맡고 있으니 아트 디렉터로 불러도 맞다.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살림법을 각종 잡지와 책 <효재처럼>에서 보여 주고 있는 살림 전문가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녀를 ‘자연주의 스타일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영역을 한군데로 한정지으려 하는 것이 문화에 대한 무지와 편견 때문이라고 항변한다.“문화는 다 통하는 것이지요. 한복 한 가지만 잘 만들 줄 아는 사람은 그냥 기능인이잖아요. 그러나 문화는 의식주와 영혼을 아우르는 총체이고 문화를 만드는 사람은 그 의미를 잘 헤아릴 줄 알아야겠지요.”한복 짓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뛰어 넘은 그녀는 전통에 대해서도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것에 대한 고집이나 애착이 있을 성싶은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선 한복에서부터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삼청동 ‘효재’에서 한복을 거의 볼 수 없고 그녀도 한복을 입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현대인이 한복을 입으면 옷고름에 밟혀서 다치기밖에 더하겠느냐는 말을 꺼낸다.“한복이야 보통 사람들은 결혼식 때나 한 번 입지, 평소에는 전혀 입지 않잖아요. 이제 한복은 무대의상으로 쓰이거나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이 되었어요. 옛날 것이어서 지금 전통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한복이 처음 생겨날 때는 그렇지 않았지요. 한복을 포함한 모든 문화는 그 문화가 생겨난 시대에 접목돼 새롭게 나타난 퓨전이었어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들이었지요.”현대에 전통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그녀는 일례로 구리 78%, 주석 22%의 비율을 가진 방짜 놋그릇이 살균력과 보관력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사실을 든다. 전통이라는 이유로 단순히 ‘감’에 의존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시대에 맞는 과학적인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녀가 말하는 문화는 과학인 동시에 자연스러움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녀는 집에서 입는 잠옷 하나를 두고도 얼굴에 로션을 바른 후 입고 벗을 때에도 편해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떠올리고 옷을 만든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설득이 되는 문화란 그 시대의 삶 전체와 세세한 일상에 통해 있는 것이어야 한다.언뜻 보기에 그녀의 첫인상은 조용하고 얌전하다. 문하생들의 실수에도 크게 야단을 못치고, 소문 듣고 한옥 집에 놀러오는 낯선 이에게도 차를 내는 여린 성품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상대가 ‘딸깍’ 소리에 마음 다칠까 염려돼 먼저 끊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속에는 스스로의 말마따나 ‘전사’가 숨어 있다. 무언가에 관심이 생기면 자신이 졸업했다고 느낄 때까지 손을 놓지 않는다. 눈에 피가 고이고 고개가 시리고 엉덩이에 물집이 잡히도록 그저 앉아서 일만 한다.그녀는 한복집을 했던 어머니의 대를 이어 옷을 짓고 있는 셈이다. 막상 본인은 어머니가 하는 일이나 다혈질인 성격을 물려받고 싶지 않아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고 한다. 성격은 자신의 노력으로 고칠 수 있는 노릇이었지만 옷 짓는 일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눈썰미가 좋아서 무엇이든 보고나서 금방 따라할 수 있었고 어떤 것이든 예쁘게 꾸며 내오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쉬웠다. 그의 유난한 안목과 성품을 잘 보여주는 어린 시절의 일화가 있다.“어릴 때 학교에서 가방을 하나 만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세상 모든 겹옷은 박아서 뒤집어 만들면 되는 거구나. 그러고 나서 완전히 방법을 터득할 때까지 어린아이가 방에 들어앉아 복주머니 서른아홉 개를 꿰맸으니 지독했지요. 지금도 여전해요. 새로운 일을 만나면 내 몸 들여다보지 않고 일만 합니다.”그녀에게는 일 외에는 별 일이 없다. 취미라고 해 보았자 그릇과 만화책 모으기가 전부다. 때마다 사람마다 구색을 맞춰 사용하는 그릇은 살림 꾸리기의 하나이니 본업에서 크게 벗어난 일도 아니다. 그릇 하나에서도 시대마다 다른 문화를 느끼는 그녀로서는 공부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한 취미다. 또 만화방이 따로 있을 정도로 많은 수의 만화책은 책 이외의 매체는 잘 접하지 않는 그녀에게 묘하게 잘 어울리는 벗이다.요즘 그녀가 또 하나 몰두하고 있는 일은 글쓰기다. 나이 50을 넘기니 세상 떠나는 준비도 생각하게 된다는 그녀는 이제야 지나온 인생을 정리해서 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노래 가사 하나 짓는데 어떤 조사를 넣을까 궁리하느라 사흘 밤낮을 끙끙댄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겨울쯤에는 퍽 읽음직한 글이 책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제가 지은 호가 ‘지금’이에요. 무슨 일이든 마음에 품고 후회하며 과거에 살고 싶지 않아요. 지금이 충분하다 싶을 만큼 현재에 살고 싶어요. 일단 찾아온 손님은 극진하게 대접하지만 돌아간 후에는 잘 갔느냐고 묻지 않아요. 언제나 지금을 살려고 합니다.”세상 모든 일은 공을 들여서 해야 하기에 사람이 하는 일에는 수작업 아닌 것이 없다. 한복 짓는 일에 품이 많이 들 것 같아 몇 명이서 함께 일하고 있는지 물었다가 그녀로부터 들은 답이다. 피아노 치는 남편의 손이 다른 사람보다 중할 것 같았는데, 세상에 손 안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며 들려준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특별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교훈 아닌 것이 없어서 대화를 나누는 내내 상대를 부끄럽게 했다. 디자이너 이효재는 사람이 저마다 귀중함을 알고, 지금에 몰입하며, 늘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시대를 앞서나가는 사람이다.김희연 객원기자 foolfox@naver.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