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기술 적극 활용…‘2008년 세계 톱3 도약’

경남 창원시 귀현동 볼보그룹코리아 창원공장. 1156만7500㎡의 널찍한 부지에 자리 잡은 이곳 생산 라인은 활기로 가득 차 있다. 각종 기계들이 뿜어내는 소음으로 들어서자마자 귀가 멍할 정도다. 창원공장의 ‘택 타임’은 10분. 생산 라인에서 10분마다 한 대씩 흔히 ‘포크레인’이라고 불리는 굴삭기가 완성돼 나온다는 뜻이다. 창원공장은 단일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굴삭기 생산 공장이다.볼보그룹코리아 창원공장에서 생산되는 굴삭기는 연간 1만2000여 대. 이 중 대부분이 해외로 팔려 나간다. 지난해 볼보 굴삭기의 해외 판매 비중은 77%에 달했다. 1998년 볼보그룹에 인수되기 전인 삼성중공업 시절에 3 대 7이던 수출과 내수 판매 비중이 완전히 역전된 셈이다. 지난해 볼보그룹코리아는 원화 강세로 많은 수출 기업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도 해외 판매를 20% 이상 끌어올리며 ‘수출 10억 달러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괴력을 발휘했다.볼보그룹코리아는 삼성중공업 중장비 부문 인수 직후부터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국내 시장에서 출혈 경쟁에 몰두하던 기존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10여 종에 이르던 생산 품목도 중대형 굴삭기로 단일화했다. 지금도 5톤 이하 소형 굴삭기는 볼보건설기계그룹의 프랑스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들여와 판매한다. 조수형 볼보그룹코리아 한국생산담당 전무는 “창원공장에서 생산된 굴삭기는 제품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과거 저가품으로 분류됐던 창원공장 굴삭기가 지금은 세계 시장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볼보의 브랜드 파워와 탄탄한 해외 판매망, 철저한 품질 관리가 결합된 덕분이다.창원공장이 본 궤도에 오르자 볼보건설기계그룹은 1999년 스웨덴 에슬뢰브 공장을 폐쇄하고 굴삭기 부문 글로벌 본사를 아예 한국으로 옮겼다. 현재 에릭 닐슨 볼보그룹코리아 사장은 볼보걸설기계그룹 굴삭기 부문 총괄 대표를 함께 맡고 있다. 한 해 1000억여 원의 적자를 내던 골칫덩어리 창원공장이 불과 몇 년 만에 주요 글로벌 기업의 핵심 허브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창원공장에는 볼보건설기계그룹 굴삭기 부문 글로벌 연구개발(R&D) 센터가 자리해 있다. 현재 239명의 연구원이 창원에서 다양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굴삭기는 둔탁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자동차보다 복잡한 첨단 기술의 결정체다. 굴삭기에 들어가는 부품 수도 자동차보다 많다. 자동차는 도로를 달리는 드라이빙 기술이 핵심이다. 하지만 굴삭기는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다양한 작업을 해내야 한다. 엄청난 무게를 거뜬히 들어 올려야 하고, 티베트의 고지나 중동의 사막 같은 극한적인 조건에서도 제대로 작동돼야 한다. 엔진과 유압, 각종 부품이 치밀하게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다.굴삭기의 경우 제품의 신뢰성은 판매에서 일반 소비재보다 훨씬 중요한 요소다. 굴삭기의 주 구매 고객은 장비 대여업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굴삭기는 비즈니스 도구다. 최대한 수익을 올리기 위해 굴삭기를 24시간 맞교대로 풀가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장비의 고장은 경제적 손실로 직결된다. 중장비인 굴삭기 부품의 60%가 항공 운송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볼보그룹코리아도 인천공항 인근에 물류 센터를 두고 있다.볼보의 굴삭기에는 항공기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V-CADS’ 프로그램이 내장돼 있다. 공장에서 생산된 이후 운행 내역 등 각종 정보가 기록되며, 이 정보는 스웨덴에 있는 정보센터에도 똑같이 저장된다. 이 때문에 굴삭기가 어느 나라에 있든 이 정보를 활용해 최적의 애프터서비스가 가능해진다. 장기간의 현장 제품 테스트도 눈길을 끈다. 볼보그룹코리아는 국내 현장 테스트에 그치지 않고 주요 모델의 경우 중국 인도 이탈리아 터키로 장비를 직접 가져가 2개월씩 다양한 환경에서 성능을 테스트한다. 이 경우 굴삭기에 센서를 다는 데만 1억 원가량의 비용이 든다.볼보 굴삭기의 핵심 경쟁력은 강력한 엔진에서 나온다. 볼보그룹은 지난 1999년 승용차 부문을 포드에 매각한 이후 사업영역을 트럭과 버스, 펜타, 항공, 건설기계, 금융서비스 등 5부문으로 재편했다. 굴삭기는 강력한 파워와 뛰어난 연비, 친환경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볼보 트럭의 엔진을 함께 쓰고 있다. 이 때문에 볼보 굴삭기는 경쟁사 제품보다 평균 10%가량 연료비가 적게 들어간다.지난해 11월 창원공장에 문을 연 첨단기술개발센터는 볼보그룹코리아의 R&D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강종민 볼보그룹코리아 첨단기술개발센터 상무는 “세계 최초로 가상 현실 기술을 활용해 현재 평균 23개월인 신제품 개발 기간을 15개월로 단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모두 150억 원을 투자해 2008년까지 단계적으로 완공될 첨단기술개발센터에는 90톤급 초대형 굴삭기의 제어 및 진동 장치들을 점검할 수 있는 대형 시험실과 정밀 소음 측정이 가능하도록 항온·항습이 유지되는 무향실, 섭씨 영하 50도부터 섭씨 영상 150도까지 다양한 조건에서 환경 적합성 시험을 할 수 있는 환경시험실, 각종 시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을 가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가상 시뮬레이션 시험실 등 14개 첨단 시험실이 들어서게 된다.굴삭기는 1000억 달러 규모인 세계 건설 장비 시장의 40%를 차지하는 최대 품목이다. 볼보는 현재 이 시장에서 세계 3위 업체다. 미국 캐터필러(30%)와 일본 고마츠(15%)가 양강 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볼보의 목표는 ‘2008년 세계 3위 도약’이다.볼보는 1999년 4.1%이던 세계 시장점유율을 지난해 8%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했지만, 2위와는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2008년까지 공격적인 R&D 투자 등을 통해 이 격차를 좁히며 명실상부한 ‘톱3’으로 자리 잡겠다는 구상이다.‘전 세계 기업이 창원공장 벤치마킹’에릭 닐슨 사장(48)은 볼보그룹코리아 성공 신화의 주역이다. 삼성중공업 중장비 부문을 인수한 1998년 재무담당 부사장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으며 2년 뒤 사장으로 승진해 연평균 18%대의 초고속 성장을 이끌어 냈다. 닐슨 사장은 “레이프 요한슨 볼보그룹 회장이 한국을 항상 성공 사례로 언급한다”며 “전 세계 기업들이 벤치마킹을 위해 창원공장을 찾고있다”고 말했다.한국의 인력은 굉장히 뛰어나다. 열심히 일하고 빠르게 움직인다. 때로는 ‘빨리빨리 문화’가 대우 사태 같은 재앙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올바른 비전과 결합되면 훌륭한 비즈니스 성과를 낳을 수 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상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보스 혼자가 아니라 가능한 한 여러 사람이 참여해 제대로 된 비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환율은 정말 중요한 문제다. 경쟁력 측면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임이 분명하다. 자동화와 R&D 투자를 통해 더 싸고, 더 빠르게 생산하는 것밖에는 대안이 없다.우리 고객은 대부분 사업을 하는 분들이다. 이들에게 굴삭기는 비즈니스 도구다. 이 때문에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단순히 제품만 파는 게 아니라 애프터서비스를 포함한 토털 솔루션을 제공해 줘야 한다. 볼보건설기계그룹은 전 세계 굴삭기 시장에 완벽한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흥미롭지만 굉장히 복잡한 과제다.고객들은 굴삭기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당 더 많은 작업을 더 적은 연료로 더 빨리 해내야 한다. 그런 기술을 만들어 내려면 R&D 성과가 탄탄하게 축적돼 있어야 한다. 기술적 측면에서 굴삭기는 우주로켓 바로 밑 단계에 해당하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다. 거기에다 디자인도 예뻐야 하고, 장시간 작업하기 위해서는 운전석도 편해야 한다.창원=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