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 자산 늘려야…노후 대비 ‘초점

“만일 격리된 채 아무 것도 읽지 못하도록 통제된 상태에서 오직 한 가지만을 알고 싶어 한다면, 아마 나는 인구 통계에 대해 알고자 할 것입니다. 다음 1~2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가구가 새로 형성될 것이며, 주택 수요는 어떻게 변할 것이고, 신규 노동자로 인한 노동 시장 압력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싶을 거예요. 이런 것들은 모두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치고 재정·금융 정책과 총수요·총공급에 영향을 미치며, 또한 채권시장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미국에서 ‘채권 왕(Bond King)’이라 불리는 빌 그로스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얘기다. 빌 그로스의 말처럼 인구 통계는 자산시장을 이해하는 중요한 축이다. 물론 인구 통계가 자산시장에서 유일한 독립변수는 아니지만 중요한 변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인구는 곧 기업의 입장에선 소비자이자 주택 수요자이고 자산 보유자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로서의 인구는 기업의 실적을 좌우하고 주택 수요자로서는 주택의 수요와 공급을 결정하며 자산 보유자로서는 자산 축적과 운용의 방향을 결정한다.자산 시장에 변화 생길 가능성현재 우리나라의 인구 구조의 특성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점이고, 하나는 중장년층으로 표현되는 베이비 붐 세대가 사회의 주역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특히 자산시장과 관련해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은 경제력을 갖고 있는 계층의 성향이다.현재 일본의 경우 55세 이상 노년층이 전체 가계 금융자산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자산 축적 욕구보다는 자산의 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노년층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예금과 같은 안전 자산에 대한 욕구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일본이 딱 이런 형국이다. 1년 만기 은행 이자율이 연 0.03%에 불과한 데도 여전히 예금이 압도적인 자산 관리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반면 우리나라는 60세 이상 노년층이 가지고 있는 가계 금융자산은 전체의 30%가량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베이비 붐 세대, 즉 30대 초에서 50대 초의 사람들이 약 60%를 소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들의 투자 성향과 자산 축적 욕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고, 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자산시장에 장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사회적으로 중장년층이 많아지면, 노후를 대비해 자산 축적 욕구가 강해진다는 게 선진국의 경험이다. 현재 우리나라도 이런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노후생활은 자산 관리의 중심 목표로 급속히 부각되고 있다.문제는 자산의 선호 방향이다. 현재 우리나라 가계의 자산 구성은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이 80%, 금융자산이 20%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각각 70 대 30, 67 대 33의 비율로 금융자산이 더 높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는 고령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유동성 선호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이런 예를 들어 보자. 30~40대가 가장 관심 있는 부동산은 바로 아파트다. 그러나 55세 이후 정년퇴직하는 사람들이 주목하는 부동산은 아파트가 아닌 상가와 같은 월세가 가능한 투자 상품이다. 생활비 개념이 중요하기 때문에 현금 흐름이 발생하는 부동산을 선호한다. 30~40대는 현재 자신의 노동력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때문에 노년층보다 상대적으로 자산의 현금흐름에 덜 민감한 편이다. 그런데 이들이 빠른 속도로 늙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 상승에 초점을 맞춘 아파트와 같은 부동산보다는 상가와 오피스 빌딩 같은 현금 흐름이 좋은 부동산이 각광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부동산은 여전히 금융자산보다는 환금성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부동산에 비해 유동성이 좋은 금융자산을 상대적으로 더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여기에 우리가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변수는 인구 감소 문제다. 우리나라는 2030년부터 인구가 줄어든다. 우리나라의 주택 정책의 핵심은 신도시 정책이다.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 그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위성에 해당되는 지역에 신도시를 만들어 분산시킨다. 신도시 정책은 인구 증가를 전제로 한 정책이지 감소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얘기한 것처럼 이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다.누구나 집만 사면 돈 버는 시대 지나지금까지의 얘기를 종합하면 ‘30~40대는 노후를 대비해 자산 축적 욕구가 점차 강해지고, 그것의 방향은 자산(stock)보다 현금흐름(cash flow)쪽을 점차 선호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인구통계학이 그동안 제시한 경험에 따르면 한국의 자산 구성은 장기적으로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 유동성이 낮은 부동산 위주로 편중돼 있고, 부동산도 현금흐름보다는 자산 가격에 초점을 맞춘 주택에 투자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자산 재조정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저금리와 저성장 문제다. 고금리 상황에서는 부동산과 주식과 같은 자산은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부동산은 안정적으로 가격이 상승해 왔다. 이는 우리나라 경제가 1970년대 이후 고성장을 하면서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부동산과 같은 지위재(地位材)는 소득의 증가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소득이 늘면 일차적으로 자동차나 주택과 같은 지위재를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교체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성장의 혜택으로 수입이 지속적으로 늘면서 지역에 상관없이 주택을 큰 것으로 교체해 왔고, 이는 최근 집값 상승에서 중대형 평형의 시세 분출로 표현됐다.하지만 이제 외환위기 이후 연 3~4%대 저성장 경제 시스템으로 접어들었다. 저성장 체제에서는 과거처럼 모든 사람들의 소득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별적인 사람들이 사회의 부(富)를 가져가는 사회로 바뀐다. 따라서 예전처럼 누구나 집만 사면 돈을 버는 시대는 장기적으로 돌아오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반대로 주식에 대한 매력은 커진다. 우량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이 늘어나고 이들 기업의 부도율도 낮아진다. 게다가 금리도 낮다. 미국도 1970년대 말에는 우리로 얘기하면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가 연 20%에 육박했다. 1979년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 ‘주식의 죽음(The Death of Equities)’이라는 커버스토리를 내보낼 정도로 시장은 흉흉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큰 창피를 당하게 된다. 3년 뒤 1982년부터 미국 증시는 역사상 최대 호황기를 구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연금이 자산 운용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미국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001년부터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초저금리 현상에 접어들었고, 중장년층의 노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 자산 축적 욕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예단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초저금리, 노후에 대비한 중장년층의 자산 축적 욕구에 따른 연금 상품의 인기 등은 장기적으로 주식시장에 튼튼한 수요 기반을 마련해 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사실 정확한 미래 예측이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나마 인구 통계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표다. 그래서 인구 통계는 뛰어난 투자가와 미래학자들의 미래를 보는 하나의 창(窓)으로 활용돼 왔다. 앞서 얘기했듯이 인구통계학이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구통계학이 보여 준 과거의 경험은 현재 우리에게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자산 운용을 재조정하라는 것이다.이상건·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부소장 lsggg@miraeass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