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사회는 장애물… 개혁 거리 멀어

독일 대표 기업인 지멘스와 폭스바겐의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잇따라 ‘낙마’하면서 독일 경제계가 벌집 쑤셔놓은 듯 난리다. 두 사람 모두 주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기 때문. 두 회사에서 비슷한 시기에 터진 비리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실은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에 밀려났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변화 거부 세력은 한마디로 독일의 이원적, 중층적인 기업 지배 구조 신봉자들이다. 경영이사회(management board)를 감시한다는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가 독일 기업 안에 온존하는 부패 고리를 끊기는커녕 CEO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스캔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반(反)부패 작업을 적극 추진하던 CEO들이 감독이사회의 힘 앞에 무장해제를 당한 것이다.독일 고유의 감독이사회는 경영의 안정성과 장기적 의사 결정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부러움의 대상이 돼 왔다. 그러나 지멘스와 폭스바겐의 예에서 보듯 감독이사회는 최근 들어 독일 자본주의의 개혁을 가로막는 집단으로 비판받고 있다.이들 회사의 스캔들은 노조를 돈으로 회유한 데서 비롯됐다. 지멘스는 4억2600만 유로(약 5346억 원)를 조성해 뇌물로 사용했다.이 중 일부를 노조 간부들에게 돌렸다는 혐의를 받았다. 폭스바겐도 노조 간부들에게 수백 만 유로의 뇌물을 주고 호화 해외여행에 접대부까지 지원해 준 것으로 드러났다. 회사 돈으로 밀애를 즐길 수 있는 공간까지 제공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노조 간부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다 발각된 일이 있었지만 독일이 몇 배는 더 심한 것 같다.노조에 ‘검은 돈’을 푼 것은 바로 노조 대표들이 감독이사회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감독이사회는 총 20명의 비상임 이사들로 채워진다. 이 중 절반인 10명이 노조 몫이다.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결정(mitbestimmung)’이란 독일의 전통이 역기능을 드러낸 장면이라 볼 수 있다.스캔들 철저조사 다짐하다 ‘역풍’처음엔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듯했다. 하지만 불똥은 예기치 않은 쪽으로 튀었다. 지멘스의 경우 하인리히 폰 피어러 회장과 클라우스 클라인펠트 CEO가 쫓겨나는 결과를 낳았다. 게르하르트 크롬 등 3명의 감독이사회 이사들이 일종의 ‘이사회실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클라인펠트는 지멘스의 수익성과 주가를 대폭 높였을 뿐 아니라 스캔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약속하고 있었다.폭스바겐의 베른트 피셰츠리더 CEO도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 그는 부패 사건을 발판 삼아 감독이사회와 노조를 개혁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런 시도가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이에 따라 독일 경제계에선 감독이사회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감독이사회가 성가신 조직이고 편협하며 때로는 이해관계의 상충에 취약하다는 비판이 들끓고 있다.한 독일 대기업 CEO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주식회사 독일의 많은 문제들은 감독이사회의 잘못에서 파생된다”고 꼬집었다. 영국 주주행동주의 투자 회사인 헤르메스의 한스 히르트 유럽 기업 지배 구조 대표는 “경영이사회는 상당 부분 변화했지만 감독이사회는 개혁의 바람이 아직 미치지 않는 지대”라고 말했다.구체적으로 지적되는 감독이사회의 문제는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점이다. A회사의 이사인 사람이 B회사와 C회사 이사를 겸임하고 C회사 이사도 A와 B회사 이사를 동시에 맡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멘스 이사실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게르하르트 크롬 현 지멘스 회장은 독일에서 6개 기업, 프랑스에서 3개 기업의 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그의 쿠데타를 도운 요제프 애커만 이사는 도이체방크 CEO이고 헤닝 슐테-노엘르 이사는 알리안츠의 회장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발전기에 독일 기업들이 외국 기업의 경영권 침탈을 막기 위해 지분을 교차 소유하던 관행이 감독이사회에 그대로 남아 있다.건설 회사인 호흐티프의 한스-피터 카이텔 전 CEO는 “감독이사회는 오늘날 (여러 회사 이사를 겸직해)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나 67세 이상의 노인들로 이뤄져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1년에 몇 차례 회의도 열지 않는다. 이들 감독이사회 엘리트는 자연히 변화에 둔감할 수밖에 없고 개혁보다는 타협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주주들 권리행사도 막기 일쑤외국인 이사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스위스 기업의 외국인 출신 이사는 45%에 달하지만 독일은 7%에 불과하다. 폭스바겐이 대표적인 회사다. 이 회사는 해외 매출이 전체의 81%에 달하는 데도 외국인 이사는 한 명도 없다. 대기업 린드의 볼프강 라이츨레 CEO는 “매출의 8%밖에 차지하지 않는 나라 출신이 왜 이사회를 장악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말한다.또 다른 문제는 주주들이 주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감독이사회가 막고 있다는 점이다. 감독이사회 성원의 절반을 노조 대표로 채우기 때문에 주주들의 요구는 오히려 외면당하기 일쑤다. 주주들은 감독이사를 선임하지만 경영이사 선임은 이들 감독이사 몫이어서 주주들이 직접 경영이사의 거취를 결정하지 못한다.폭스바겐에서도 피셰츠리더를 축출하고 노조 간부를 경영이사회 이사로 앉혔다. 한 감독이사회 이사는 “폭스바겐은 피흐 회장과 노조가 이끄는 회사”라며 “(회사가) 건강치 못한 원인”이라고 말했다.기업 지배 구조 전문가들은 공개적으로(경영자들은 개인적 의견이라며) 이런 시스템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스템을 개혁하는 일이란 쉽지 않다. 어떤 접근 방법이 필요할까.헤르메스의 한스 히르트는 “주주들이 감독이사 선임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며 “문제 있는 감독이사를 해임하려면 현행 제도에선 주주의 75% 이상 찬성이 필요한데 이를 50% 이상 찬성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며 구체적인 주문을 했다.좀 더 근본적으로는 내부에서부터 변화가 추진돼야 한다. 사무엘슨은 주주들이 노조 대표들을 압도하는 공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독일에선 ‘찬성 20, 반대 0’의 의사 결정이 너무 많다”며 “의견이 대립되더라도 ‘찬성 11, 반대 9’도 필요하다는 공격적인 인식 변화가 주주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독일의 적지 않은 기업들이 최근 일반적인 유럽식 기업 시스템(European Company set-up)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감독이사회를 12명 성원으로 줄이고 노조를 대표하는 이사에 외국 근로자를 뽑고 있다. 알리안츠(금융)와 포르쉐(자동차), BASF(화학) 등이 이런 변화를 추구한다. 이전보다 작아진 감독이사회는 좀 더 효율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 외국인 이사의 배치는 노조 대표가 여전히 50%를 차지하더라도 명망가 중심의 이사와 노조 대표의 공동 결정이 갖는 폐해를 그나마 줄여줄 수 있다.독일 고유의 이원적 이사회는 운영하기에 따라 상당한 장점을 갖고 있다. 영미식이 옳다, 대륙 모델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듯이 경영계에는 역시 모법답안이 없다. ‘경우에 따라 다르다(It depends)’란 답이 여기에도 해당된다.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을 강구하고 전 사회와 경제계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상황이란 점엔 이견이 없다.돋보기 감독이사회란?미국식이자 우리식 이사회는 하나의 이사회 안에 일반 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를 참여시켜 CEO 등의 경영진을 견제하도록 한다. 독일은 이런 기능을 따로 떼어내 감독이사회를 만들었다. 경영이사회의 경영 활동을 견제하고 경영이사의 임명권을 갖는다. 주주 대표 10명과 노조 대표 10명으로 구성된다. 주주와 노조 측 의견이 대립하면 감독이사회 의장이 캐스팅 보트를 쥔다.독일 상법에선 감독이사가 경영이사를 겸직할 수 없도록 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다. 대주주는 주로 감독이사회에 포진하고 전문경영인들이 경영이사를 맡게 된다. 이런 구조에선 경영 실적이 나쁘거나 도덕적 문제를 일으킨 CEO 등을 경질하기가 쉽다. CEO의 책임 경영을 가능케 하는 장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