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본 경제는 곳곳에서 부활의 찬가를 부르고 있지만 엔화는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가끔 강세를 보일 때도 있지만 대체적인 기조는 분명 약세다. 강한 경제는 결국 강한 통화로 표출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요즘의 일본은 이런 기본 경제 법칙과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일본 기업들이야 살판이 났다. ‘엔저’라는 날개를 달고 세계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다. 일본 자동차 생산량이 13년 만에 미국을 앞질렀다는 최근의 뉴스는 이 같은 ‘엔화 약세’를 밑그림으로 깔고 있다.일본 기업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미국은 일본 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쏟아 붓고 있다. 특히 미 의회가 거품을 물었다. 미 하원 세입·금융·에너지상무위원회는 지난 9일 합동으로 엔화 약세에 대한 청문회를 열고 일본이 엔화 약세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의회에서 법안 상정 등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는 방안 등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존 딩겔 에너지상무위원회 위원장(민주당)은 “일본 정부가 엔화 약세 기조를 의도적으로 유지시켜 자동차 산업에 일종의 ‘수출 보조금’을 주고 있는 데도 부시 행정부는 일본을 환율 조작국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며 “행정부에 대해 불공정 환율 관행을 감시하고 문제를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게 의회의 의무”라고 강조했다.미국의 주장대로 일본 정부가 엔화의 약세를 방조 내지 조장하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엔화 약세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최근의 엔화 약세를 크게 세 가지의 키워드로 풀고 있다. 우선 낮은 금리다. 일본의 기준금리는 현재 0.5%로 거의 바닥에 붙어 있다. 반면 유로존의 기준금리는 현재 연 3.75%, 미국과 영국은 각각 연 5.25%, 호주도 연 6.25%로 매우 높은 편이다.일본의 물가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향후 금리 인상도 기대하기 힘들다. 최근 발표된 일본의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 0.3%로 2개월 연속 뒷걸음질쳤다. 시장은 일본은행이 올 4분기(10~12월)까지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엔 캐리 트레이드도 한 몫두 번째는 엔 캐리 트레이드의 성행. 일본에서 낮은 금리로 자금을 마련한 뒤 유럽 등 높은 금리를 주는 지역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국제 금융시장의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엔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 ‘엔화 대출→외환시장에서 엔화 매도→유로화 등 고금리 통화 매입→엔화 약세’의 흐름이 반복되는 것이다. 지난달 선진 7개국(G7) 재무장관 회의에서 엔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엔 캐리 트레이드를 부추긴 요인이다.세 번째는 올 7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 경기에 부담이 되는 금리 인상을 선거를 앞두고 결행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다. 이래저래 당분간은 낮은 금리로 인한 엔화 약세가 불가피한 구조다.하지만 경제 현상에 ‘항상’이란 단어는 없는 법이다. 주변 여건에 따라 언제든 환율은 변한다. 일각에서는 이미 엔화 약세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근거는 미국과 유럽 등 엔화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국가들의 금리 움직임이다. 그동안 가파른 오름세를 보이던 미국과 유럽의 금리가 숨고르기에 들어가면서 이런 견해는 힘을 얻는 분위기다.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 9일(현지시간) 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를 연 5.25%로 동결하고 당분간 금리 수준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브레이킹뷰스닷컴>의 마틴 허치슨 애널리스트는 FRB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미국 경기가 둔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FRB가 금리를 올리면 경기 침체의 주범으로 몰릴 수 있다. FRB는 이것을 우려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풀이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FRB와 보조를 맞춘 듯 다음날인 10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현재 수준(연 3.75%)으로 유지했다. 엔 캐리 트레이드 광풍이 조금씩 잦아드는 조짐도 엿보인다. 일본 오카산증권의 소마 쓰토무 외환 딜러는 “투자자들이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통해 리스크를 줄여나가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