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 일선 ‘썰렁’…에어컨은 ‘씽씽’

지난 15일 낮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의 강서자동차 매매단지. 중고차 매장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주변은 정적이 돌만큼 조용했다. 서울에는 장한평, 일원동에 1개씩의 매매단지가 있지만 등촌동은 4개 단지에 120여 개의 매매상이 모여 있는 대형 단지다. 기자가 지나가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기저기서 호객꾼들이 나와 “차를 보러 왔느냐”고 접근해 왔다. 워낙 손님이 없다 보니 동네 주민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이 기웃거리면 금방 달려와 영업을 시작하는 것이다.매매는 잘 이루어지고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대답뿐이다. 2005년부터 계속 판매 대수가 떨어져 지금도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들이었다. 차를 사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상담이나 문의도 많이 줄었다. 경기가 좋으면 차를 바꾸지만, 경기가 나쁘면 차를 수리해서 쓰기 때문에 문의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갑작스러운 유가 급등은 자동차 구매 심리를 더욱 옥죄는 변수다.강서자동차 매매사업조합 사무실에 올라가 전반적인 현황을 문의해 봤다. 지난해 3~4월에 비해 올해 3~4월이 판매가 조금 덜 된 것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자동차는 계절에 따라 수요가 달라지기 때문에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물어봤던 것이다. “새 차가 잘 팔려야 헌 차도 잘 팔리는데, 지금은 차도 잘 안 팔리지만 구하기도 힘들다.” 새 차의 판매 부진이 중고차의 매매 부진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실제 신차 판매 딜러들도 경기가 나아졌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기아자동차 교대역 지점의 허영봉 판매팀장은 “5월에는 계절 수요가 생겨나는 시기로 지금은 매우 바쁠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작년 이맘때도 거의 비슷했는데, 솔직히 상승 기세가 나타난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다만 판매 대수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지만 차종이 양극화되고 있다는 점은 달라진 점이다.현금 구매는 오히려 늘어나“예전 같으면 승용차의 경우 소형 15%, 준중형 30%, 중형 40%, 대형 15%였다면, 지금은 소형 20%, 준중형 20%, 중형 30%, 대형 30% 정도로 소형과 대형으로 소비 패턴이 양극화되는 점이 눈에 띕니다.” 중간대 차종이 줄고 아예 소형 아니면 대형으로 몰리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허 팀장의 교대역 지점은 구매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강남 고객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데도 현상 유지에 급급한 편이다. 그렇다면 강북 지역은 어떨까. 현대자동차 혜화지점의 최진성 차장은 “그나마 직장인들은 꾸준히 사는 편이지만, 동대문, 남대문 시장의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많이 받다 보니 신차 구매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차를 수리해 1년이라도 더 타고 보자는 심리가 아직 그대로다”라고 전했다.자동차 구매와 관련해 눈에 띄는 현상은 할부 판매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최 차장은 “경기가 좋으면 무리해서라도 지르고 보자는 심리가 있지만, 경기가 나쁘다 보니 이자비용도 아끼려고 현금 구매를 하거나, 할부를 하더라도 현금 50% 이상을 내고 소액만 할부로 하기도 한다. 예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시기에도 현금 구매가 많았다”고 귀띔하고 있다.신차의 판매가 줄어들면 어부지리로 중고차 판매가 늘어난다는 말도 있다. 중고차 딜러들 중에는 경기가 바닥을 쳤음을 체감한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영등포, 광명시, 부천 지역을 영업무대로 삼고 있는 중고차 딜러 정영훈 씨는 “전년 동기 대비 10~15%가량 매매가 늘어났다. 자동차의 매각 요청도 많아지고 문의는 30%, 실제 구매는 15% 정도 늘어난 것 같다”고 얘기하고 있다. 정 씨에게도 현금 구매를 하는 고객들이 최근 들어 많이 늘었다는 점은 앞서의 딜러들과 공통되는 점이다. 이는 경기가 나아져 현금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할부 이자를 내고서라도 무리하게 차를 구매하지 않고 철저히 실수요자들이 여유 자금으로 사기 때문이다. 딜러들에 따라 체감하는 부분이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실제 경기가 살아나고 있음을 느끼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자동차의 단가가 다른 생필품에 비해 높다 보니 경기의 변동에 비교적 늦게 반응한다는 점도 경기 바닥을 확인하는 데 방해 요인이 되기도 한다.경기 체감 속도가 느린 자동차와 달리 전자제품은 비교적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5월 들어서면서 긍정적인 신호를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전자제품 중에서 판매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품목은 에어컨과 노트북PC다.2분기 상황 더 지켜봐야에어컨은 경기보다 날씨에 더 민감한 품목이다. 지난 2005년 ‘사상 최대의 더위’ 뉴스가 연초부터 떠들썩하면서 에어컨 판매가 크게 늘었다. 2005년의 판매 급증으로 2006년에는 대부분의 에어컨 업체가 마이너스 성장을 해야 할 정도였다. 올해도 벌서부터 무더위 뉴스가 나오면서 에어컨 판매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5배의 판매량 증가를 보이고 있다. 하이마트의 양동철 과장은 “어느 정도 경기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지난겨울이 따뜻했기 때문에 무더위를 예상한 수요가 많아졌습니다. 냉장고는 여름철에 잘 팔리는 데 비해 에어컨은 여름철보다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겨울부터 예약 판매가 늘어나고 있는데, 비수기에 사는 수요는 여유 자금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구매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에어컨의 판매량 증가와 더불어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는 ‘원 인 원(1 in1: 실외기 한 대에 에어컨 한 대가 달린 것)’이 많이 팔렸지만 올해는 ‘투 인 원(2 in 1: 실외기 한 대에 에어컨 두 대를 연결하는 것)’ 제품이 많이 팔리는 것이다. 투 인 원 제품이 50만~70만 원이 더 비싼 것을 감안하면 구매 고객의 씀씀이가 더 커진 것을 알 수 있다.최근 비데의 판매가 늘어나는 점도 청신호다. “비데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약간은 ‘사치품’적인 성격의 제품이라 소비심리의 ‘바로미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최근 추세는 비데를 생필품처럼 사는 것이 추세입니다.” 홍대 앞 LG전자 대리점의 김도연 실장의 설명이다. 예전에는 문의 고객 10명 중 1~2명이 샀다면 지금은 3~4명이 구매하고 있다.LCD TV, PDP TV의 판매도 전년에 비해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평판 TV의 가격 하락 때문으로 전체 매출액은 변동이 없는 편이다. 예전 40인치 TV가 230만~240만 원대였던 것이 지금은 150만~160만 원으로 가격이 낮아졌다.하지만 아직 경기 회복의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비싼 고급 사양의 전자제품이 많이 팔리는 것은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소비 양극화 때문이지 전체적인 구매력 향상의 신호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데나 공기청정기도 ‘얼리어답터’ 수준을 지나 보급 단계에 있기 때문에 판매가 늘어나는 것이라 성숙 단계의 제품들과는 다른 차원의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다. 에어컨의 경우 또다시 ‘역사상 최고 더위’ 뉴스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판매가 늘어난 것은 ‘날씨 변수’ 때문이지 ‘경기 변수’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이마트의 가전·레포츠 판매를 총괄하고 있는 김홍극 팀장은 “집값 하락과 부동산 거래 위축으로 이사를 하지 않으니 가전제품 교체 수요가 대폭 줄어들었고 또 지난해 쌍춘년 결혼 특수로 전자제품이 많이 팔리다 보니 ‘경기 바닥’을 확인하려면 아직 좀 더 두고 봐야 한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