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어주고 밀어주고’… 선의의 경쟁 펼쳐
재벌가에는 형제 기업인들이 많다. 부모가 일군 가업을 형제자매가 나눠서 물려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가정에서는 경영인을 한 명 배출하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두 명 이상이나 배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현역에서 활동하는 형제 경영인들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는 이들에게 뭔가 특별함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다.대기업에서 활동하는 전문경영인들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형제 경영인은 삼성전자의 이상완 LCD총괄 사장(57)과 효성그룹의 이상운 부회장(55)이다. 이들이 속한 회사가 워낙 크다 보니 웬만한 중소기업 오너보다 더 주목받는 위치에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서로 형제로 엮어서 언급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직급은 동생인 이 부회장이 더 높지만, 형인 이 사장이 몸담고 있는 곳이 세계적 기업인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군이기 때문이다.이처럼 직급이 비교되는 이유는 두 사람이 같은 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배경 때문이다. 이 사장은 서울고, 한양대 전자공학과,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마치고 1976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메모리본부 생산기획담당 이사, LCD사업부장(전무), LCD총괄 사장을 거치며 생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것과 달리 이 부회장은 기획, 재무, 전략을 두루 맡아 그룹 전반의 두뇌 역할을 해 왔다.이 부회장은 경기고,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후 역시 1976년 효성물산에 입사했다. 밀라노 지점장, 해외관리·시장개척 담당, 기획관리실장, 재무본부, 비서실장, 전략본부장을 거친 뒤 올해 2월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효성그룹의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은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 동업자였으나 일방적으로 경영에서 손을 떼라고 해 삼성에서 물러난 바 있어 이들 두 형제의 삼성과 효성 근무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LG공익재단의 오종희 총괄부사장(59)과 오중희 현대백화점 홍보실장(52·이사)도 잘 알려진 형제 경영인이다. 이들은 모두 대외적인 업무를 많이 맡다 보니 자선단체 행사장에서도 종종 마주치기도 한다. ‘명절에도 잘 만나기 힘든데, 이런 곳에서 만난다’며 서로 반기는 스타일이다. 오 부사장도 엘지애드에서 1년 3개월가량 근무한 데다 이후 LG복지재단, 연암문화재단, 연암학원에서 근무해 홍보와 사회공헌 분야에 정통하고, 오 이사도 홍보팀장으로 오랫동안 홍보 업무를 맡았다. 이들 형제는 동종 업무에 종사하지만 경쟁 관계는 아니다 보니 서로를 독려하는 사이다.동종업계 진출 많고, 돈독한 정 과시금융계에서는 정문국 알리안츠생명 대표이사(48)와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54)이 형제 경영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 대표는 올해 1월 알리안츠생명의 신임 대표이사가 됐고, 정 부사장도 올해 1월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 다 금융과 경제 분야에서 각자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다 보니 숫자에 능한 유전자를 타고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 한국외국어대를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형은 영어과를, 동생은 네덜란드어학과를 졸업했다.한국투자공사(KIC) 홍석주 사장(54)과 국민은행 리테일 상품팀장인 홍석철 팀장(48)도 형제 금융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홍 사장은 조흥은행 신입사원으로 금융계에 발을 디뎠고, 홍 팀장은 국민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홍 팀장이 국민은행 코엑스지점장을 할 때 형인 홍 사장은 조흥은행장을 하고 있었다.형제는 아니지만 김신배 SK텔레콤 사장(52)과 윤창번 전 하나로텔레콤 회장(53)은 처남 매부 사이로 묘한 인연을 이뤘다. 김 사장의 부인인 윤소영 씨의 오빠가 윤 회장이다. 두 사람은 경기고, 서울대 산업공학과의 1년 선후배다. 윤 전 회장이 자신의 동생을 김 사장에게 소개해 결혼에 이르게 할 정도였으니 두 사람 사이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결국 두 사람은 국내 굴지의 무선통신 회사와 유선통신 회사의 수장을 맡기도 해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두 사람의 친분 때문인지 SK텔레콤이 하나로텔레콤을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소문이 증권가에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2005년 윤 전 회장은 결국 경영 부실의 책임을 이유로 경질되면서 인수·합병(M&A)설은 수그러들었다. 윤 전 회장은 이후 별다른 직책을 맡지 않고 지내다 올해 카이스트 정보미디어최고경영자과정(ATM)에서 이용경 전 KT 사장과 함께 초빙교수로 강의에 나서고 있다.한치 양보없는 ‘실적전쟁’ 벌이기도대부분의 형제들은 이종 업계에 있어 경쟁할 일이 별로 없거나 동업자인 반면 동종 업계에서 경쟁하는 형제 경영인들도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이런 경우는 그런 속설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보이기도 한다.윤의국 고려신용정보 회장(57)과 윤의권 전 서울신용평가정보 회장(50)은 적어도 사업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라이벌이었다. 형인 윤의국 회장이 1991년 고려신용정보를 창업하자 동생인 윤의권 회장은 이듬해인 1992년 서울신용평가정보를 설립했다. 이들은 둘 다 철저히 밑바닥부터 시작한 자수성가형 인물들로 형은 음식점, 심부름센터 등을 거쳤고, 동생은 향우산업 전산실장, 퀵서비스 업체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한때 동생의 회사가 형 회사의 매출액을 앞지르기도 했지만 결국 서울신용평가정보는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2003년 회사를 넘겼고 형제간의 경쟁 구도는 사라지게 됐다. 이후 동생 윤의권 전 회장은 정치로 진로를 바꿔 한나라당 재정경제위원회 정책자문위원을 맡기도 하고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다.배중호 국순당 사장(53), 배혜정 누룩도가 사장(50), 배영호 배상면주가 사장(47)은 부모의 가업을 이어받은 경우지만 동종 제품으로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이다. 일반적인 재벌의 경우에도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줄 때는 서로 겹치지 않는 영역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이들의 아버지인 배상면 국순당 회장(82)이 1983년 국순당을 설립할 때 장남인 배중호 사장과 막내인 배영호 사장이 함께 가업을 일궜다. 이후 동생인 배영호 사장이 먼저 독립해 1996년 배상면주가를 창업하면서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국순당과 배상면주가는 히트상품인 백세주와 산사춘에 힘입어 전통주 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배혜정 사장은 아버지 배 회장과 함께 전통 탁주를 현대적으로 복원하기 위해 누룩도가를 운영하고 있다. 전 가족이 모두 ‘술독’에 빠져 살고 있는 셈이다.에이스침대의 안성호 사장(39)과 시몬스침대 안정호 사장(36)도 대표적인 경쟁 관계의 형제 경영인이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안유수 회장(76)의 공장에 드나들면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고교 시절에도 시간을 쪼개 매주 한 번씩은 공장을 찾았고, 대학생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경험을 익혔다. 형 안성호 사장은 1992년 에이스침대에 입사해 2002년 대표이사가 됐다. 대표 취임은 동생 안정호 사장이 빨랐다. 미국 유학 후인 1998년 입사한 뒤 3년 만에 시몬스침대 대표이사가 됐다.이들 형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재 구입 등의 얘기를 전화로 나누기도 하지만 기술이나 디자인 개발에 관해서는 절대 얘기하지 않는다. 형은 현장을 중시하는 편이고, 동생은 기획과 트렌드를 읽는 데 밝은 편이다. 2002년에는 아버지인 안 회장이 미국의 2위 침대 회사인 썰타침대의 국내 라이선스를 들여와 아들들과 경쟁을 시작하면서 3부자의 침대 대결로 이어지고 있다.소리바다의 양정환 사장(33)과 양일환 이사(38)는 함께 사업을 시작한 동업자다. 두 사람 모두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던 중 미국에서 파일 공유 프로그램인 냅스터를 접하고 소리바다를 구상하게 됐다. 이듬해인 2000년 한국에 들어와 소리바다를 만들었다. 당시 양정환 사장은 스물일곱 살에 정보기술(IT) 신화를 쓴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형 양일환 이사는 나이가 더 많지만 오로지 프로그래밍에 미쳐 산다고 할 정도로 엔지니어 스타일이라 경영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